떠나는 이유

로드무비 2009. 6. 18. 04:12 |
 누군가 떠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오겠다고 하기도 하고, 배낭여행이 빠진 대학생활은 뭔가 아쉽고 섭섭해 떠나기도 한다. 이유가 어떻든 다녀온 모든 사람들은 말한다. 가서 좋았다고, 너도 가보라고, 결국 여기와 같다는 것을 깨닫지만, 넌 달라진다고.

 여행을 결심하는 건 쉽다. 나는 그렇게 쉬운 결심을 했었다. 대학생이 되면 성인이 되면 여행을 떠날꺼야. 그래서 나에게는 이유가 없었다. 당연한 것처럼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결심은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명확한 형태를 가지진 못했었다. 현실적인 맛이 없는 결심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런 느낌이었다.
 
 여행을 갈거야. 대학교에 들어가서 뭘 할거냐는 질문에 늘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두 가지의 여행을 꿈꾸고 있어. 하나는 유명한 도시에 머물면서 디자인과 예술을 배우고 싶어. 뉴욕, 런던, 파리 같은 도시들 말이야.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롭게 방랑하면서 세상을 보고싶어. 티벳, 인도, 브라질 같은 나라들 말이야. 그런데 그런 꿈이란 말 그대로 '꿈' 이어서, 절대로 현실로 내려오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음- 언젠간 떠날건데 말이지' 라면서 '꿈'을 '현실'로 끌어내려 하지 않고 있었다.
 
 여름의 문턱에서 나는 생각했다. 벌써 반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갔구나. 나는 왜 그동안 여행을 현실의 저 반대편에 밀어놓고 군침만 흘리고 있었던걸까. 돌아켜보건데 나는 혼자 여행을 떠난적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순천이나 부산같은 곳을 여행하긴 했지만 '우리말'의 테두리 안에 있었다는 점에서 내가 생각하는 -무거운 배낭을 맨 낯선 느낌의- 여행은 아니었다. 해외로 갈 때는 과학 탐방이나 인턴십 같은 어떤 테두리가 있었던 점을 고려해보면 나는 홀로 멀리 가는 여행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척 했지만 사실은 여행 한 번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여행하지 않으면서 여행을 좋아하는 척 하는 취향. 여행이라는 '꿈'은 '그런 척 하고 싶어하는 취향'이 만들어낸 걸지도 모르겠다. 그 '척 하고 싶어하는 취향'이 이유라면 여행을 굳이 현실로 만들 필요는 없다. 그냥 꿈의 한 켠에 놓아두면 그런 취향인 척 할 수 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비로소 이유가 생겼다. 이제는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 해 보지 않고 동경했던 것들, 꿈 꾸지 않고 꿈만 꾸던 것들을 하나씩 실천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 혹은 살아가야 한다 라고 생각했다. 맞다. 그래야 해. 

 그러니까 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떠난다라는 바로 그 지점이다.



* 그래서 일단 비행기표를 샀다. 8월 18일 출국, 12월 22일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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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rldofddanj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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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철을 타고 서울대병원에 갔다. 너무 학생복 같은 것은 아닐까 싶은 흰 반팔 남방을 의식하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를 읽었다. 대방 쯤인가, 한 여자분이 내 옆에 앉으셔서 햄버거를 꺼내 드시기 시작했다. 살짝 옆을 쳐다보았는데 무한도전 돌+I 콘테스트에서 진지하게 태권도를 하시던 그분이었다. 얇은 슬라이스 햄과 허니머스타드 소스향을 진하게 풍기면서, 천천히, 햄버거를, 다 드셨다. 그런 자리에 앉아 혜화역을 가면서, 각자의 기다랗고 복잡한 생활 중에 어쩌다 잠깐 스쳐지나가기는 하지만 서로의 생활에 거의 - 때로는 전혀 -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생각했다. 영어 회화 선생님이나, 동네 미용실의 연습생이나, TV 콘테스트에 출전한 사람이나, 술집에서 혼자 춤을 추던 여자분 같은, 그런 사람들. 그 사람들도 언젠가 학생복 같은 흰 남방을 입었거나 두피상태가 썩 좋지 않았거나 옆자리에서 힐끔힐끔 쳐다보던 학생으로 나를 생각할까. 그렇게 대부분 잊혀지지만 이따금 생각나기도 하고 그 사람은 잘 지내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한 그런 것들이 세상에 따뜻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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