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9월 1일+2일. 아이슬란드 아홉째 날, 열째 날

 페로제도에서 아이슬란드에 도착하니, 마치 익숙한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고작 일주일간 여행했던 곳이지만, 두 발로 걸어 누비고 다녔던 길과 골목들이 그런 착각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터미널로 다시 돌아가 오늘 오후에 Gullfoss-Geysir Direct 프로그램과, Blue Lagoon Tour 티켓을 끊었다.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유명하고 대표적인 투어프로그램이라면 Gullfoss 폭포, Geysir 간혈천, Þingvellir 국립공원을 둘러보는 Golden Circle Tour와 아이슬란드의 대표적인 관광상품인 Blue Lagoon Tour(Reykjavík에서 블루라군 야외온천, 온천에서 Keflavík으로 가는 버스표와 온천 입장권 포함)이 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하루 종일 투자해야 하는 Golden Circle Tour는 일정상 불가능했지만, 그 중에 Gullfoss와 Geysir를 둘러볼 수 있는 반나절 짜리 프로그램이 있었다. 론리 플래닛은 Blue Lagoon을 (가면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안 가면 섭섭한 아이슬란드의 여행코스로 꼽았는데, Keflavík 공항에서 가까워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로 해 두는 게 좋다고 해서 내일 오후 비행기로 런던에 가기 전에 온천을 즐기기로 했다. 이런 프로그램은 시내 인포메이션 센터나 관광오피스, 혹은 터미널에서 사전에 구입할 수도 있고, 당일 버스운전기사에게 직접 결재를 할 수도 있다.

 열두 시 반에 출발하는 투어 버스를 기다리며, 터미널의 기념품 가게에서 나에게 어떤 선물을 줄까 둘러보았다. 나중에는 흐지부지 되었지만, 나라마다 기념이 될 만한 것들을 사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슬란드어로 ‘나는 아이슬란드어를 못 해요’라고 써 있는 티셔츠도 마음에 들었지만, 역시 여행의 로망은 지도- 1:600,000 비율로 인쇄된 아이슬란드의 지도를 구입했다.

 투어버스에 올라 앉아있는데, 한 동양인 여자분과 외국 분이 늦게 올라 타서 두 명이 앉을 자리를 찾는다. 내 자리를 비켜드렸더니 고맙다고 하면서 나를 유심히 보신다. 여행을 하면서 언제나 가장 불편하고 어색한 순간 – 이 사람이 한국 사람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느라 빤히 혹은 힐끔 쳐다보는 시간 – 끝에 그분이 나에게 한국사람이냐고 묻는다. “Yes, 네! 한국인이에요.” 외국인 남자친구와 함께 여행을 오셨나 보다. 한국인을 참으로 오래간만에 본다고 반가워하신다. 나도 일주일 만에 한국 분을 한 분 만나고, 그 다음으로 만나는 거라고 했다. 그 뒤로 이야기를 할 시간은 없었지만 투어를 마치고 버스에서 배낭을 메고 휘청거리며 걷는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행운을 빌어주셨다. 

 투어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 Geysir와 Gollfoss를 구경했다. 아이슬란드에 대해서 조사하기 시작한다면 누구나 가장 먼저 보게 되는 대표적인 두 자연경관은, 그래서 오히려 감흥은 덜 했다. 연기를 뿜으며 갈색과 푸른색 샘에서 물이 조금씩 차 오르다가 어느 순간 큰 소리와 함께 폭발하는 간혈천은 놀라웠다. 하늘 높이 치솟는 물기둥, 바로 수증기가 되어 얼굴을 습하게 덮는 물안개는 놀이동산의 재미있는 기구 같다. 사람들이 간혈천을 둘러싸고 카메라를 눈에서 때지 않은 채 물이 솟아오르기를 기다리는 풍경이라던가, 누군가가 “three, two, one!”를 외치면 모두가 기대했다가 솟아오르지 않는 샘을 보고 웃음을 터트린다거나 하는 모습들은 그야말로 귀엽다. 하지만 가장 큰 간혈천에 관광객들이 돌을 던져 넣어 이제는 활동하지 않아 폐쇄되었다는 안내는 결국 세상을 망가트리는 것은 인간인 것 같아 씁쓸했다. 아무리 곤란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여행 중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겠다는 작은 결심을 세웠다.







 Gollfoss는 그 거대한 사이즈의 폭포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안경을 뿌옇게 만들 만큼 작은 물방울들이 쏟아지는 길을 따라 걸으면, 거대한 소리를 내며 나보다 많은 세월 물을 쏟아 내렸을 폭포가 보인다. 폭포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재미있는데, 멍하니 거대한 물의 흐름에 시선을 맡기다 보면 물은 액체가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 고체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거대한 물의 덩어리가 떨어지고 깨지고 박살이 나는 것을 한참이고 들여다본다. 먼지 대신 작은 물방울이 흩날리고, 땅이 흔들리는 대신 고막이 진동한다. 아니다, 땅도 흔들렸던 것 같다.





 어느 나라를 가도 투어는 비슷한가 보다. 안내 아저씨는 나름 재미있는 말투로 끊임없이 이런저런 설명과 이야기를 쏟아내고, 약간 거슬리는 음량의 스피커는 개인적인 생각이나 풍경에 집중하는 걸 지속적으로 방해한다. 영어에 귀를 기울이는 건 정말이지 큰 에너지를 소모한단 말이다. 왜 아이슬란드의 날씨가 따뜻한지, 왜 아이슬란드에는 나무가 별로 없고 초원이 발달해 있는지 등등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며, 아저씨는 투어비용을 아까워하는 관광객이 없게 하려고 고군분투 중이었다. 이유가 궁금해서 귀를 기울이면 대답은 순식간에 지나가 있었고, 나는 결국 뭔가를 듣고 이해해 지식을 쌓는 것을 포기하고 창 밖의 풍경을 보거나 기록했다. 이렇게 고요하고 평온하고 끊임없는 풍경도, 내일이면 안녕이란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유스호스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 그 동안의 지출들을 정리했다. 여행을 떠난 이후로 하루하루의 지출들을 엑셀파일에 정리해 놓았다. 이런 습관이 돈을 아끼게 하기도 하고, 쉽게 잊혀져 갈 하루 하루에 어떤 것들을 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사실 아이슬란드의 여행은 곧 돈을 적게 쓰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는데도 비싼 물가와 아직 여행 중에 돈을 아끼는 방법을 몰라 지출이 생각보다 컸다. 각오했지만 그걸 직접 계산기 두드려 눈으로 확인하는 건 큰 스트레스였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페로제도의 고물가…) 이대로 런던으로 넘어가면 또 엄청난 돈을 쓸 것 같았다. 아이슬란드에 이어 런던이라니, 여행계획을 세울 때 돈을 펑펑 쓰는 게 목표였나 보다!
 그날 저녁에 나는, 아이슬란드의 여행을 정리하거나 런던에서 새로운 계획을 찾는 게 아니라 인도나 네팔로 가는 비행기표를 찾느라 온 시간을 보냈다. 아시아 지역을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고, 조금 비싼 값을 주고 비행기표를 사더라도 거기에서의 생활비가 저렴해 만회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결과적으로 저렴한 생활비로 만회하기에는 비행기 값이 ‘정말로 어마어마하게 비싸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해야 했지만.

 유스호스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먹고 모든 짐을 챙겨 나왔다. 아침식사는 무려 1000ISK였다. 만원이 넘는 아침이라니, 여행 중에 때로는 아침이 가장 고급스러운 식사가 되기도 한다. 유스호스텔 앞 우체통에 친구들에게 쓴 엽서를 넣고 버스를 탔다. Blue Lagoon Tour표를 미리 구입하면 숙소와 버스터미널을 연결해주는 픽업버스가 30분 전에 Reykjavík 시내를 한 바퀴 돈다. 벌써 네 번 이상 오간 버스터미널은 너무나 익숙해서 반가웠다. 이제 Reykjavík, 아이슬란드의 이런 풍경도 마지막인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나만이 발견한 새로운 자연에 대한 탐구를 여기에서 마치는 것만 같았다. 더 많이 구경하고, 더 가기 어려운 곳들을 방문해볼걸.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여행이었다고 생각한다.



 Blue Lagoon은 고급스럽게 개발된 관광지였다. 로고부터 건물의 전체적인 톤까지 건강과 휴식이라는 테마로 디자인되어있었다. 입장권을 제시하고 수영복을 빌려 들어갔다. (여기에 올 걸 알면서도 한국에서 수영복을 가져오지 않았다. Blue Lagoon에 가서 온천을 해야지. 그런 그렇고 겨울이니까 수영할 일은 없겠지? 이런 짧은 사고의 결과였다)
 Blue Lagoon은 정말 멋진 온천공간이었다. 아이슬란드 특유의 검은 돌들로 둘러 쌓인 야외에 하늘색과 우유 빛의 물이 뜨거운 연기를 피워낸다. 하얀 머드로 팩을 하면서 차가운 아이슬란드의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 비싼 돈을 주고 관광하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었다. 아이슬란드라는 미지의 공간을 다니면서 쌓인 몸의 피로가 풀리면서 마음이 느긋해지는 게 과연 아이슬란드 여행의 마무리 코스랄 만 했다. 
 엄마아빠가 생각났다. 부모님, 특히 엄마는 온천을 정말 좋아하시는데 몸에 좋으면서도 아름다운 Blue Lagoon온천에 오시면 탄성을 지르며 호들갑스러워 지실 텐데.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면서 놀랐던 점 중에 하나는 중년 이후, 혹은 은퇴한 뒤에 노부부가 손을 잡고 여행하는 풍경이었다. 그 뒤에 유럽을 여행하면서도 그런 어른들을 많이 만났고, 자신의 삶과 행복을 찾아 여유를 즐기는 노년생활이 부러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나는 혼자 여기에서 무슨 재미를 보려고 와 있는 걸까? 부모님이 오기에는 너무 멀고 또 쉽지 않은 여행지지만, 언젠가 꼭 와보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공항으로 가는 버스 시간이 다가오는 걸 알면서도 뜸을 들이다가, 결국 버스를 놓쳤다. 헐레벌떡 주차장으로 나왔는데 아무도 없을 때의 철렁함이라니.
 “저기, 공항으로 가는 버스 벌써 떠난 거야?”
 절박한 나의 표정을 보고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아마도 떠난 거 같다며 공항 쪽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합승을 부탁해보라고 한다. 이제는 다른 길로 가야 하니 여기에서 내려야 한다는 커플의 차를 거쳐 커다란 덤프트럭으로 옮겨 탄 후, 런던에서 학교를 다니는 딸을 위해 공항으로 간다는 모녀가 나를 Keflavík 공항으로 인도해 주었다. 끝까지 아이슬란드는 나에게 야생이자, 여행의 혹독한 오리엔테이션이었다.



 페로제도에서 사둔 중국 컵라면과 콜라로 점심을 해결하고, 공항 앞을 서성이며 이런 저런 생각들을 했다. 무작정 찾았던 이 곳에서 나는 성장한 것 같았고 그래서 아쉬운 이별처럼 느껴졌다. 공항 특유의 깨끗한-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느낌은 거의 없어 진공처럼 느껴지는 복도를 지나며 이 주 전 처음 이곳에 발을 내디뎠을 때의 긴장감이 떠올랐다. 이국적인 풍경, 읽을 수 없는 광고의 문구들, 너무나도 다른 유전자의 사람들과 무거운 배낭…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지나, 이제는 이 곳이 말 그대로 ‘익숙’해졌다. 매일 이동을 하고, 산을 올라 서재 방바닥에서 잠이 들고, 바다를 향한 벤치에 앉아 석양을 보고, 비바람 속에 사투를 벌이던 시간들, 크고 작은 폭포와 빙하, 드넓은 초원과 아름다운 길들… 겨우 2주가 지났을 뿐이고, 전체 여정의 1/8이 지나갔을 뿐인데 너무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배웠다. 아이슬란드는 나에게 너무 특별한 여행지였던 것이다.



 안녕. 비행기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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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rldofddanj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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