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로제도 구경 3

로드무비 2010. 1. 17. 20:29 |

 페로제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 같이 합숙(?)했던 여행자들을 빼 놓을 수가 없다. 길어야 이틀이면 숙소를 옮기며 이동하는 배낭여행의 패턴과는 다르게, 페로제도에서는 Tórshavn 유스호스텔에 내내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4일 내내 같은 방을 썼던 홍콩 계 영국인과 스위스 아저씨는 조금 특별한 친구가 되었다. 자신을 알파라고 소개한 영국 친구는 건축 일을 하는데 매일 밤 가장 늦게까지 그 날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고 다음날 여행을 계획했다. 그리고 아침이면 누구보다 일찍 숙소를 나섰는데, 여기까지 와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야심 찬 여행가 스타일이었다. 그는 특유의 제스츄어와 빠른 말을 동원해 어디어디가 좋다면서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도록 매 번 권해서 나와 아저씨를 종종 피곤하게 하기도 했다. 스위스 아저씨는 국적이 조금 복잡했는데, 아무튼 지금은 은행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조금 느긋하게 여행하는 게 나와 비슷해서 알파와 가벼운 충돌이 있기도 했다. 여기가 볼만하냐, 아니냐 와 같은 아주 사소하고 주관적인 것들에 대해서. 알파는 거기는 아무것도 없는 초원이라며 그런 것은 많이 보지 않았느냐는 편이었고, 아저씨는 그래도 하이킹 코스가 참 좋지 않느냐는 입장이었다. 둘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건 항상 나였는데, 다음 여행장소에 대한 간단한 조언을 구하려던 순진한 의도는 늘 이렇게 당황스러운 결과를 초래했다. 각종 탄식과 감탄사들이 오가는 매일 저녁의 숙소가 재미있었다. 때때로 가벼운 조언을 넘어선 참견에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알파가 하루 먼저 페로제도를 떠날 때는 그마저 아쉬웠다. 늦잠을 자느라 이른 아침에 떠나는 그에게 인사를 건네지는 못했지만, 그마저 알파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욕심이 많은 여행가고 나는 늦잠을 자느라, 우리는 아침에 한 번도 인사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개인사에서 출발한 이야기들은 언어와 세계사까지 언급할 정도로 깊어졌고, 나도 점차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행을 떠나본 이래 이렇게 많은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내 영어가 이해하기 쉽다며 높이 평가했지만 실은 한정된 어휘를 가지고 표현하려다 보니 생긴 효과였다. 여행객 하나 없을 것 같았던 페로제도에서 처음 말문이 트인 것이다.
 


 일요일에는 운행하는 버스가 한정되어 있어, 두 친구의 조언을 따라 오전에는 Kirkjubøur에 갔다가 오후에는 숙소로 돌아왔다가 수도인 이 마을(Tórshavn)을 둘러보기로 했다. 한적한 하이킹을 할 수 있는 Kirkjubøur은 스위스 아저씨의 추천이었고, Tórshavn의 겔러리와 건축물들은 알파의 추천이었다.






 Kirkjubøur에 가려면 버스를 타고 입구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거센 바람과 겁 없이 도로를 건너는 양때를 보며 심난해 하고 있는데 친절한 여행자들이 차를 태워줬다. “꽤 멀고, 바람이 거세잖아.” 과연 알파가 별로라고 할 만큼, 별다른 게 없는 마을이었다. 아주 작은 교회와 프레임만 남겨진 오래된 유적이 전부였다. 안내표지판 앞에 서서 그 언어를 해석해 이 유적의 의미를 머리에 새겨 넣으려고 했지만, 귀찮음에 그냥 걸었다. 오래된 돌에 손을 얹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척, 멍하니 걸었다. 바람결에 날리는 긴 앞머리가 무심해 보이는 소와, 해변가를 따라 길을 걸으며…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을 했다.



 Tórshavn으로 돌아와 겔러리와 공원을 둘러보면서도 무심한 회의감에 휩싸였다. 알파가 입에 거품을 물고 추천했던 The Nordic House는 이름만 듣고 기대했던 박물관 혹은 유적이 아닌 그냥 문화공간이었다. ‘건축적으로 흥미로웠다’는 건축가의 추천이라는 점을 간과한 벌이었다. 일요일을 맞이해 시설 좋은 축구 구장에서 열정적인 경기를 펼치는 청소년들을 보면서도 어떤 에너지나 생각을 하기보다는 그래 그들은 이렇게 살고 있구나, 그런데 나는 뭘 하고 있는 걸까 싶었다. 비싼 물가를 탓하며 계속 걸었다. 아무런 자극적인 풍경이나 경험이 없어서인지 그들과 나 사이에 어떤 친밀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구경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기는 한 걸까 의심스러웠다. 계속 어딘가 가고 무언가 보고 걷지만 오늘 하루 뭘 했는지 전혀 와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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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rldofddanj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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