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8월 25일. 아이슬란드 여섯째 날

 강한 햇살이 잠을 깨웠다. 비싼 숙소 특유의 하얀 면 커버 위에 누워 창으로 떨어지는 햇빛을 보는 게 좋아 그대로 조금 더 누워있었다. 여행을 한 뒤로 매일매일 이동을 했는데 (그렇다. 겨우 5일이 지났을 뿐인데 몸은 2주정도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은 이 작은 도시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고, 그래서 게으름을 피우기로 한다. 게을러지기. 여행을 하면서 게을러지기란 은근히 어렵다. 뭔가 걷고 봐야만 할 것 같은 강박에, 나 같은 사람조차도.


 어제 호텔에 물어보니, 시 도서관에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일단 오늘 머물 숙소를인터넷으로 체크하기로 했다. 이틀이나 이렇게 비싼 곳에서 잘 수는 없다. 산뜻한 도서관은 조용하면서도 자유로운 분위기, 음반과 DVD, 다양한 책들과 멀티미디어 시설들을 갖추고 있었다. 인터넷을 하러 왔다가 도서관 구경을 했다. 괜히 Sigur rós의 앨범을 발견하고 반가워 한다거나, 거대한 지도책을 뒤적거리며 아이슬란드의 지나온 마을들을 찾아본다. 작은 선물 같은 공간이었다. (나는 이런 공간에 약한 편이다.) 그리고 그 선물은 인터넷으로 예약 가능한 숙소가 없다는 것도 알려줬다.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숙소를 연결해 주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어제는 저녁 6시에 도착해 유스호스텔 숙소를 체크하는 사이 문을 닫아 일단 인포메이션 센터에 가 볼 걸, 계속 후회했었다. 일단 가 보자.
“어제 머물렀던 숙소가 나에게는 너무 비쌌거든. 2000~3000ISK 정도의 게스트하우스 없을까?”
친절한 스텝은 (신기하게도) Akureyri의 숙소의 예약현황을 문서로 가지고 있었고 (“이런 시스템이 가능하다니?”) 그 표에 의하면 정말로 주말 내내 모든 숙소가 꽉 차 있었다. ‘잠시만-‘ 이라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빠른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나는 데스크에 매달려 마음은 간절하지만 얼굴은 부담을 전혀 주지 않겠다는 상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게스트하우스로 가 봐. 숙소는 다 찼는데, 주인이 엑스트라 자리를 만들어 주겠대.”
2500ISK라니, 어제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일단 인포메이션 센터로 가 볼걸.

 주인은 나를 별채 – 라고 하기에는 조금 아쉬운 작은 건물로 안내했다. 옆에서 진행되는 확장공사가 끝나면 이 건물까지 게스트하우스로 쓸 예정이라고, 일단은 폐쇄해 둔 곳을 이용하라고 키를 주었다. 엑스트라 건물을 쓰기로 한 김에 사람을 더 받기로 했나 보다. 성격 좋아 보이는 여자도 내 맞은편 침대를 차지했다. 
 “오! 우리 Mývatn에서 만났지!” 라는데 사실 난 기억이 전혀 없다. 아마 같은 숙소를 썼고, 유일한 동양인이어서 기억에 남았나 보다. 뭔가 대화를 했던 것 같진 않은데… “내가 외국인 얼굴을 잘 기억을 못해서 그런가 봐. 미안.”이라고 했다. 확실히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이라서.

 게스트하우스로 짐을 옮기고 나니 이미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다. 거리에 빵 냄새가 환상적인 곳에 들어가 빵과 물로 아침 겸 점심을 해결했다. (아 이런 걸 브런치라고 부르지…) 주민들은 ‘이 녀석은 어디서 날라와서 내 아지트를 차지하고 있는 거야’ 라는 듯한 눈초리가 느껴진다. 인터넷으로 Reykjavik과 Vestmannaejar의 유스호스텔을 예약했다. Vestmannaejar에서는 아이슬란드의 마스코트와도 같은 puffin을 볼 수 있는 투어가 있고 작은 섬이라 자유 트래킹이 가능할 것 같아 버스와 페리 비용의 부담이 있지만 가 보기로 했다. (버스를 이용해 Reykjavik에서 Þorlákshöfn로 이동한 뒤 페리로 Vestmannaejar로 이동이 가능하다. 보통 버스의 도착시간에 맞춰 페리가 출발하는 식으로 연계가 되어 있지만 버스패스의 구간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 개별티켓을 따로 구입해야 한다.) 왕복티켓, 아이슬란드 왕복티켓을 제외하곤 예약은 하나도 없이 떠난 여행이라, 처음으로 내일 머물 숙소가 정해지고 나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이 도시를 만끽하리라. 가볍게 산책을 하기로 했다.





 아이슬란드의 두 번째 큰 도시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소박한 중심거리를 지나 Akureyrarkirkja라는 (나로서는 발음조차 불가능한) 교회로 가는 언덕을 걸었다. 초급 아이슬란드 어 책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중고 책방에 들리기도 한다. 거리의 사람이 입은 작업복, 건물 벽의 페인트 색이나 도로의 물길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표지판은 어떤 색을 사용하는 가 등의 작고 사소한 것들을 연구하는 사람이 되어 길 위에서 자료들을 수집한다. 마을 언덕 위에는 하얗고 과장된 꾸밈은 없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건하게 하는 교회가 있었다. 우울한 종소리와 함께 장례식이 마무리 되고 있었다. 만(灣)을 바라보고 선 낮고 차분한 건물들과 물길을 따라 만들어진 새들의 공간도 여행자의 눈에는 신선하게만 느껴진다. 두 번째로 큰 도시라고는 하지만 지도를 들고 유명한 곳을 방문하기보다는 무작정 걸으면서 헤맬 때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었다.




 겔러리가 있어 들어가 보니 폴락을 연상시키는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인사동의 작은 겔러리들처럼 ‘뭘로 이 겔러리는 먹고 사는 걸까?’라는 생각과 ‘참 작고 아담한 공간이다’라는 생각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그런 곳이었다. 사실 같은 스타일과 기술로 여러 작품이 전시되어서 특별히 이 그림이 좋았다, 그러기에는 어려웠지만 <Sometimes it takes time>이라는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짧지만 지난 몇 일간 여행을 하면서 든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나면서 마음에 들었다. 그래 뭐 조금 시간이 걸리거나 돌아가도 어떻게든 되더라, 하는 낙관이 여행을 하면서 조금씩 생겼던 것이다.
 테이블에는 작가의 작품이 소개된 책들을 볼 수 있게 해 두었는데, 놀랍게도 한국잡지도 있었다. 그 뒤로도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곳에서 한국어나 한국의 흔적을 발견할 때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알고 보니 한국에서도 소개된 작가였다. 반가운 마음에 큐레이터에게 말을 걸었더니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었다. 서울을 비롯한 몇 개 나라에서 투어전시를 했었고, 이 겔러리는 과거에 감자포대를 쌓아두던 창고였다고 했다. 짧은 영어로나마 계속 대화를 하려고 하는 모습에 고마웠다. (작가의 이름을 어딘가에 적어두었는데 여행 중에 잃어버렸다. 작은 겔러리라 검색도 쉽지 않고..)



 Akureyri의 botanical garden인 Lystigarður Akureyrar는 지도상으로 봐도 작지 않은 정원인 것 같아 이 정원을 가로질러 마을 외곽까지 하이킹을 하기로 한다. 길을 찾는데 애를 먹어 한참을 돌다 이제 막 정원으로 가는 길로 접어드는데 오픈카를 탄 젊은 아이들이 경적과 함께 소리를 지르며 내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깜짝 놀란 나를 보고 깔깔 웃으면서. 도시에서 이방인은 장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근데 도시의 아이들은 왜 이렇게 버릇이 없는 것일까? 심지어 아이슬란드에서조차! 회색의 시멘트가 뿜어내는 냉기와 엔진의 진동이 만드는 미세한 소음에는 아이들의 심성을 비트는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아이슬란드를 잘 모르는 사람은 ‘거기 춥지 않나?’라고 하고, 여행에 관심이 많은 분은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이름은 정말 아이러니하지.’라고 한다. 그런데 이 정원(이자 식물원)을 걸으며 아이슬란드 각지의 식물들, 또 세계에서 수집한 꽃과 풀들을 보고 있자면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점점 모호해진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은 없는 거 같아. 나의 편견이 지도를 펴 놓고 여기서는 살 수 없지 않겠느냐며 엑스표 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야 야! 사진찍어줄게!”
누군가 ‘거칠게’ 말을 걸어왔다. 뒤돌아보니 남자와 여자, 돌로 만든 벤치에 앉아 치킨을 먹고 있었다. 마흔은 되어 보이는데 가죽잠바에 액세서리들이 심상치 않다. 아이슬란드에도 히피족이 있나? 거기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다. 도시의 사람들에 대한 경계가 바짝 들었던 지라 이거 불안한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에이 나 도둑 아니야! 사진기 안 훔쳐가! 내 여자친구랑 사진 찍어!”
 조금 주춤한 태도를 보이니 자기는 도둑 아니라고, 계속 자기 여자친구와 사진을 찍으라고 한다. 왜 그런 사람 있지 않은가 호의가 너무 적극적이라 부담스러운 사람. 더 거절했다간 자신을 도둑으로 생각한다며 화 낼 기세다. 내 카메라는 필름카메라여서 찍기 쉽지 않다, 괜찮다고 설명하니 그럼 내가 너 사진을 찍어주겠단다.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할 틈도 주지 않고 나를 길에 세우더니 사진을 찰칵, 찍어버렸다. 흐리멍텅하지만, 아이슬란드에서 누군가가 나를 찍어준 유일한 사진이 되었다.


 쾌활하게 인사하며 자신과 여자친구를 소개해준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특유의 과장된 제스츄어로 ‘와우! 거기서 여기까지 왔어?’ 하며 등을 퍽하고 친다. 히피인가봐… 자신들은 아이슬란드에 사는 사람인데 주말에 Akureyri에 놀러 왔다며 와서 치킨 먹지 않겠느냐고 또 사람을 재촉한다. 딱 보기에도 다 먹어서 뼈랑 쓰레기밖에 안 남았는데… 이게 사람을 놀리나?
 “다 먹었는데 뭘 먹으라고 그래! 우리는 이렇게 다 먹고 남은 것들은 여기 사는 고양이를 위해 놓아두곤 해”
 민망했는지, 남자보다는 조금 덜 히피스러운 여자가 자신들은 정상적인 사람임을 웅변한다.
 “여기 토끼도 사는 걸? 한 마리 사는 걸 지난번에 봤어.”
 “토끼가 한 마리만 있겠어? 이걸 할려면 적어도 둘 이상이겠지!”
 하며 묘한 표정을 지어가며 허리와 엉덩이를 앞뒤로 흔들어 보인다. 아… 그런 것까지 설명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아무튼 나는 얼른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낌새를 눈치챘는지 남자는 갑자기 비석을 가리키며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저기 저거 보이지? 어떤 여자가 이 정원을 만든 거거든. ‘여자가. 정원을. 만들었다.’ 근데 이게 문법이 틀려서 ‘여자가. 정원에서. 했다.’가 된 거야.”
 내가 이해를 못하니 옆에 여자가 설명해준다. 남자는 또 허리를 흔들며 나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사람들 정상일까? 아이슬란드어를 모르니 이게 맞는 말인지 나를 가지고 장난치는 건지 모르겠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오케이. 나 이만 가볼게. 라며 인사를 거듭했다. 이 남자는 벌써 섹스에 대해선 가감 없이 털어놓는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했는지 아쉬운 듯 등을 퍽 치면서 잘 가란다. 무서워, 야. 그리고 난 그들이 떠난 걸 확인하고 다시 돌아와 그 비석을 찍었다. 지금 이걸 왜 찍고 있는 거야? 생각하면서.


 정원으로부터 언덕을 따라 난 좁은 길을 걷고, 다시 메인 거리로 돌아와 오늘은 조금 비싼 곳에서 식사를 하기로 하고 음식점을 물색했다. 어떤 음식이 있는지, 가격대는 적당한지, 분위기는 좋은지, 그러면서 혼자 가서 먹어도 괜찮을지. 혼자 뭔가를 하는 데는 아주 익숙한데도, 그리고 외국이기에 더더욱 타인의 시선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는데도 여행 중에 혼자 좋은 곳에서 식사하기란 쉽지 않다. 여기저기 가족과 연인들이 가득한 곳에서, 눈치 없는 서버가 안내해준 4인용 테이블을 독차지하고 비싼 음식을 먹었다. 뭘 먹었냐고? 햄버거. 동양인의 마지막 자존심이,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몰라서 실수하는 모습을 들키는 것 까지는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 밖의 거리와 사람들을 구경하며 (그리고 그들은 내 모습을 구경하며) 밥을 먹었다. 여행 첫 날 Vik에서 레스토랑에 간 뒤로, 어디서 안정적인 음식을 먹는 건 처음이었다.


 밤의 Akureyri를 둘러보고 서점과 카페가 함께 운영되고 있는 (아이슬란드에는 이런 형식의 공간이 많았다.) 곳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여행을 떠난 후 처음으로 ‘안정감’이라는 걸 생각했다. 나는 아이슬란드의 작은 마을들이 좋아. 하지만 나는 도시의 삶에 익숙해져 있어서 카페의 테이블과 인터넷, 노트북 같은 것들을 필요로 한다. 아마 내가 아이슬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살게 되더라도 하루 이틀 행복해 하다가 도시를 꿈 꿀 것이다. 런던이나 파리에 가서 살고 싶다고, 빙하나 산 따위는 지긋지긋하다고. 나는 대자연의 아이슬란드 속에서도 이 숙소에서는 인터넷이 되는 곳인지, 전원을 사용할 수 있는지 그런 것들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도시로 가면 이 한적한 자연이 그립다며 변덕을 부리겠지. 버릇없는 아이들과 성에 민감한 히피들이 있어도 좋은 음식점, 도서관, 카페가 있는 이 곳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나를 보면서 ‘정말 도시에 익숙해져 있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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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rldofddanj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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