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듬해 봄에 나는 김나지움을 떠나 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아직 어디서 무얼 해야 할지 몰랐다. 코 밑에는 작은 수염이 자랐다. 나는 성인이었다. 그렇지만 완벽하게 무력했고 목표가 없었다. 단 한 가지, 내 속의 목소리, 그 꿈의 영상만 확실했다. 그 영상의 인도에 맹목적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임무를 느꼈다. 그러나 어렵게 느껴졌다. 그리고 날마다 나는 반항했다. 내가 돌았나보다고 때때로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은 걸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해내는 것은 나도 모두 할 수 있었다. 약간 열심히 애쓰면 플라톤을 읽을 수 있었고, 삼각법 과제를 풀거나 화학 분석을 따라갈 수 있었다. 단 한 가지만 나는 할 수 없었다. 내 안에 어둡게 숨겨진 목표를 끌어내어 내 앞 어딘가에 그려내는 일, 교수나 판사, 의사나 예술가가 될 것이며, 그러자면 얼마나 걸리고, 그것이 어떤 장점들을 가질 것인지 정확하게 아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려내는 일, 그것은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나도 언젠가 그런 무엇이 될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내가 그걸 안단 말인가. 어쩌면 나도 찾고 또 계속 찾아야겠지. 여러 해를, 그러고는 아무것도 되지 않고, 어떤 목표에도 이르지 못하겠지. 어쩌면 나도 하나의 목표에 이르겠지만 그것은 악하고, 위험하고, 무서운 목표일지도 모른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데미안


*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유년시절부터 나를 여러번 휩싸았던 열병같은 감정에 실로 오래간만에 가 닿았다. 늘 그 감정의 영향아래 있었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 다시 아파보는 건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다. 불현듯 가방 속의 <데미안>이 떠올랐다. 트랙킹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답을 찾아가듯이 책을 읽기를 반복했다. 싱클레어의 생각에, 데미안의 말에 나의 생각과 모습을 비춰봤다. 오래간만에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지난 시간들을 꿰뚫었던 사건들이 하나의 의미로 묶이는 걸 느꼈다. 마음이 타들어가듯 아팠었는데 그 의미를 알게 되는 것 만으로도 한 결 가벼워졌다. 나에게도 데미안이 있었으면 좋겠다. 멀리서부터 찾아와 나의 생각과 꿈들을 해석해주고 나에게로 이르는 방법을 알려주는 데미안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날의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Paris  (0) 2009.10.13
London  (6) 2009.09.07
Viðareiði  (4) 2009.09.02
Posted by worldofddanji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