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왠지 꼭 일기를 쓰고 싶었다.


다음주 랩세미나 발표도 있고 해서, 당분간 서울에 올라가기가 어렵지만, 후원받으면서 한 약속이 있어 이번달에 책이 꼭 나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몇가지 일이 겹쳐서 작업속도가 올라가지 않았는데 서울에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인 오늘(아니 어제, 수요일.)이 다가와서 정신적으로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화요일에 해야 할 일들을 빠르게 처리하고 저녁부터 작업에 착수했는데, 자정을 넘어가면 늘어지는 현상을 어김없이 겪으면서 결국 아침 일곱시 반까지 작업을 했다. 시간내에 할 수 있을까 하는 긴장과 몸의 망가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무리 쥐어짜도 서문에 딱 맞는 이야기가 없어 시간만 보내다가 결국 포기하고 서울에 올라가서 쓰기로 했다. 딱 한시간 잘 수 있었는데 자다가 못 일어나서 오늘을 공칠까봐 무서웠지만 너무 피곤해서 결국 침대에 누웠다. 다행히 몸이 긴장해서 한시간만 자고 일어날 수 있었다.


원래 타야했던 셔틀버스를 놓쳤다. 그래서 그냥 느긋하게 방에 있는 밥과 카레로 아침을 먹고, 더북소사이어티에서 사온 <2011년 5월 24일 화요일>을 읽었다. 같은 곳에서 일하던 14명의 군인이 2011년 5월 24일 화요일에 썼던 일기를 모아놓은 독립출판물이었다. 비슷한 형태의 기획을 구상하고 있어서 사놨다가 이제야 보게 되었다. 머리가 멍멍하고 몸이 천근만근 무거운데 군대의 하루를 서로다른 입장과 소감으로 적은 일기를 보고 있자니 사람들이 말하는 군대의 '좇같음'이 너무 생생하게 다가와서 무서웠다. 이제 두세달 지나면 나도 군대문제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확정짓는 순간이 오는데 그게 은근히 무섭다. 누군가의 생각으로 한순간에 정해진다는 것이 조금 우습기도 하고. 어제 학교에서는 또 한 학생이 죽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산디과에 친구들을 만들기 전까지 엄청나게 외롭고 쓸쓸한 대학시절을 보냈는데, 나는 그런 쓸쓸함이 이 학교의 정서라고 또 나의 기본적인 감정의 베이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 시간을 살아남아 다 보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내가 군대를 가더라도 어떻게든 잘 흘려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게 무서운 걸지도 모른다. 군대에 갔는데 너무 잘 보내고 나올 것 같아서. 직장에 갔는데 너무 잘 지낼 것 같아서. 내가 그냥 그런 시스템에 딱 맞는 너무나 사회맞춤형 사람일까봐. 그걸 확인하게 될까봐 겁이 난다.


아침 열시 반 버스를 타고 서울에 와서, 대한극장에서 책의 서문을 작성하고 인쇄소에 갔다. 한시 반부터 다섯시 반까지 네시간동안 열심히 뛰어다니며 인쇄감리를 봤다. 종이를 선택하고 발색을 확인하고 판단하는 순간은 긴장되고 어렵다. 학교에서는 이런 교육을 전혀 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포스터를 인쇄한다면 종이는 몇 그람이 적당하며 코팅은 어느정도 되어있어야 좋을 것인가. 희미하게 기억속에 있는 수 많은 포스터들의 질감과 무게감을 떠올리며 순간적으로 판단해 결정을 내려야 한다. 색 확인도 그렇다. 이게 마젠타가 강한건지 먹을 더 때려야 하는지 그냥 컬러바만 보고 OK하면 되는지 모르겠다. 또 인쇄기가 빠르게 돌아가면 발색이 강해지지만, 마르면서 색이 먹어들어간단다. 그걸 감안해서 지금 색상이 좋은 지를 판단해서 알려드려야 한다. 기사님들에게 기가 눌릴까봐 단호하게 결정해야 하는데도 자신이 없어지곤 한다. 누가 알겠는가 이게 최고의 결과인지.


그럼에도 인쇄소에서는 뭔가.... 흥분감이 있다. 자극적이고 신선한 잉크의 냄새와 무게감을 가지고 돌아가는 기계의 소음, 착착착 들어가서 찍혀 나오는 종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기계미'라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게 된다. 섹시하다. 배울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인쇄실제에 대한 공부를 해 보고 싶다. 기계를 만져가면서, 직접 찍어보면서. 그러면 디자인도 좀 더 잘 하고 결과물도 잘 예측하고 판단할 수 있을텐데.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OK를 내려야 하는 감리현장인데도 막 흥분해서 동영상을 찍고 그랬다. 진이 다 빠졌지만 책에 쓰일 몇 대를 제외하고 모든 감리를 볼 수 있었다. 포스터가 생각보다 잘 나와서 기분이 좋았고 엽서종이를 잘 못 선택한 것 같아 아쉬웠다. 전무님 이하 기사님들은 참 친절하게 잘 대해주시는데, 가끔 잉여종이로 퉁치시려고 하는 것 같아 신경이 곤두선다.


가가린에서 책 입고를 요청해서 충무로에서 구일 우리 집에 들렸다가, 다시 서촌까지 가서 책을 입고했다. 원래 마감이 7시 반인데 나를 위해 조금 더 가게를 열어주셨다. 가가린의 운영자 분들은 어떤 분들일까 늘 궁금하다. 계기가 있다면 좋을텐데. 오늘 입고된 책은 주말부터 열리는 파주 AR festival 가가린 부스에서 소개되고 판매될 예정이라고 했다.


너무 피곤하고 배고파서, 혼자 갈 만한 식당은 아니지만 근처 목화식당에 주저앉아 밥을 먹었다. 무슨 곡물인지는 모르겠지만, 곡물을 끓인 물이 맛있어서 계속 마셨다.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것 참 간편한 생각이군,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대전에 내려가고 싶었지만 머리가 너무 길었고, 또 이발할 기회도 별로 없기 때문에 꾸역꾸역 종로3가까지 걸어가서 이발을 하고 돌아왔다. 요즘 몸이 무너지는 것 같아 좋은 음식들을 건강하게 먹고, 운동도 해야지 했는데 하루종일 걷고 뛰고 신경쓰다보니 힘들어서 에라 모르겠다 베스킨 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죽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잤다.


다음주면 책이 나올 것 같다. 그 책을 서점에 입고할 즈음이면 논문도 어떻게 방향이 잡혔길 바라고, 다음 예정된 작업도 좋은 결과물로 클라이언트와 미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엄청나게 피곤하고, 흥분과 긴장이 하루 종일 팽팽했던 날이었다. 그런데도 오래간만에, 드디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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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rldofddanj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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