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디자인 페스티벌 1/2

 런던에 한 달 이나 머물기로 했던 첫 번째 이유는 내가 여행 했던 9월에 런던에서 London Design Festival (http://www.londondesignfestival.com/) 이 열리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100% Design London”을 보려고 했는데,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다 보니, 이 디자인 전을 포함해 3주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런던 전역에서 디자인 페스티벌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페스티벌이 집약되는 것은 4일간 earls court에서 열리는 “100% Design London”에 있겠지만, 런던 각지에 흩어져 있는 디자인 스튜디오/학교/숍 들이 자신의 공간을 오픈하고 관람객을 자유롭게 맞이한다는 점에서 진정 ‘도시가 모두 참여하는 디자인 페스티벌’이라고 할 만 하다. 그리고 이런 시도가 가능한 것은 시에서 돈을 많이 쏟아 부어 외형적인 퍼포먼스를 화려하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디자인과 관련된 소규모 스튜디오들과 학교, 그리고 그들의 결과물을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판매할 숍들이 자생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디자인 환경이 마련되었기에 가능한 페스티벌이다. 진짜 디자인 도시라고 한다면, 개인이나 그룹이 자신의 디자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월초에 갔던 디자인 뮤지엄에 가이드북이 쌓여 있어 한 권을 가져왔다. 디자인 페스티벌에 참여한 곳마다 페스티벌 기간 중 개방하는 날이 서로 다르다. 그래서 같은 지역이라도 며칠에 걸쳐 나누어 방문해야 모두 둘러볼 수 있다. 이 많은 곳들을 다 둘러 볼 자신은 없고, 지역별로 가장 많은 곳을 방문할 수 있는 날을 골라 돌아다녔다.

 시작은 east 지역인데, east라고 해서 런던의 동쪽은 아니고, central인 SOHO지역을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가이드북이라고 해 봤자 작은 책자인데 지도표시가 상당히 모호하게 되어있고, 런던의 구석구석에 위치한 겔러리/스튜디오를 일일이 찾아 다니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건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처음에는 가이드북을 들여다보며 열심히 찾아 다니다가, 점차 주변을 구경하다가 페스티벌 스팟을 발견하면 들어가서 보는 식으로 바꿨다. (특히 이 east 지역은 마켓을 포함해 재미있는 게 많은 편이었다.) 가장 신기했던 건, 런던에 도착한 이래로 난생 처음 인베이더의 작품을 보았다는 것! (여기에서만 두 작품을 보았다.) 사진을 찍자 그 건물에서 일하던 아르바이트 아저씨가 이 작품 찍으면 돈을 내야 한다고 자꾸 돈을 요구하는데, 내가 영어가 짧지 않았어도 아우, 하면서 쿨하게 돌아섰다. 순진한 관광객에게 거짓말 해 돈을 뜯어볼까 생각했을 그 분의 생각도 재미있고…



 인베이더는 거리 곳곳에 고전 게임 겔러그의 캐릭터들을 타일작업하는 작가인데 얼굴이나 이름 공개 없이 게릴라식 작업으로 유명하다.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인베이더를 찾는 재미가 쏠쏠한데, 심지어는 인베이더가 표시된 가이드 맵이 따로 제작되기도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중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바로 얼마 전까지 런던에서 그의 작품을 전시했다고 한다. 준비 없이 여행간 것이 조금 아쉬운 대목이었다.


 하루 종일 헤매고 다녔지만 생각보다 재기 발랄한 프로젝트나 결과물은 적었는데, 디자인페스티벌을 100% Design London처럼 큰 개념의 엑스포라고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런던 각지의 소규모 스튜디오, 디자인 학교 등에서 자신들이 그 동안 진행했던 결과물이나 과정을 러프하게 전시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아주 특별하거나 마감 퀄리티가 좋은 것들을 거창하게 전시해 놓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수한 작품들을 모아 잘 보여주는 것 뿐만 아니라, 비록 수준은 낮거나 어설프더라도 개인 스튜디오나 학교에서 작업한 것들을 소개할 수 있는 열린 페스티벌이 신진 디자이너나 관련전공 학생들에게는 더 실질적인 도움이자 교류가 되지 않을까. 산업디자인 전공자로서는 제품의 프로토타입을 볼 수 있다거나, 스튜디오들의 작업공간을 제재 받지 않고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좋았다. 오픈 스튜디오 기간답게 관람자에게도 친절했는데, 어떤 작업이나 단체인지 설명을 해 주거나 앞으로 있을 발표회에 대한 메일링을 받기도 했다.




 emerge라는 그룹(www.thisisemerge.com)의 전시에서는 jack lee (www.flickr.com/photos/jacktherabbit) 의 주차장 위에서 바닥에 프로젝트를 쏘아 실시간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프로젝트가 인상적이었고 Sarah prismall (www.sarahprismall.co.uk) 의 테이프로 만든 포스터도 좋았다. 재치있는 디자이너인 Dominic Wilcox의  "Anti-Theft Bike/Car Device"라는 자전거/차를 녹슬어 보이게 하는 스티커는 도시라는 특수한 공간이 제품을 더 오래되 보이도록 유도하는 디자인이 재미있었다.

 
jack lee, "Observer From Above"
© jack lee

Dominic Wilcox,  "Anti-Theft Bike/Car Device"
© Dominic Wilcox
 
 west에서는 아예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보고 싶은 스튜디오나 숍은 구글맵에서 미리 길을 파악해두고 론리 플래닛에 표시해뒀는데도 런던의 도로표시체계를 따라잡기 어려웠다.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스퀘어만 나오면 헷갈려서 헤매기를 반복해야 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마침내는 ‘목적지를 없애자’고 하고 론리 플래닛을 배낭에 넣어버렸다. 일단 디자인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지역이니 굳이 가이드북을 의존하지 않고 발에 걸리는 데로, 눈에 보이는 데로 구경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냥 King’s Road를 따라 디자인 소품 가게들과 명품 브랜드 숍들이 있는 거리를 걸었다. 내가 좋아하는 무인양품UK도 있었다. 빅토리아 근처 MUJI에서 여행에 쓸 플립-플랍을 구입했었다. 환율을 고려했을 때 한국보다 싸다고는 할 수 없어 군침만 흘리며 구경하다 나왔다.
 길을 따라 걷다가 사치 겔러리 (http://www.saatchi-gallery.co.uk)가 있어서 구경하기로 했다. 플랏의 주인누나는 패션관련 회사에서 일을 하는 분이었는데, 일전에 포토샵 작업을 도와달라고 하신 것을 계기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사치 겔러리를 추천해 주셨다. 아주 잘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런더너에게 사랑 받는 겔러리라고 귀띔해주셨다. 현대미술이라 이해할 수 없는 작품들도 많았고 특별히 이거다! 할 정도로 내 마음을 끄는 작품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익히 들은 데로 겔러리 자체가 멋졌다. 깨끗하고 조용하고, 넓고, 한 작품을 위해 할애한 공간이 아주 커서 집중하면서 한 작품 한 작품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놀랍게도, 가장 위층의 특별전시는 한국의 현대미술 작가 전이었는데, (상설전시가 너무 난해해서인지) 다른 어떤 전시보다도 인기가 있었고 관람하는 사람들도 즐거워했다. 내가 보기에도 재기 발랄한 작품들이 많아서, 괜히 뿌듯했다. 이런 동떨어진 곳에서 한국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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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rldofddanj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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