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레이트 겔러리 + 네셔널 겔러리 2/2

 연달아 네셔널 겔러리만 구경하면 지루할 것 같아 바로 뒤쪽에 있는 National Portrait Gallery에 갔다. 초상화만을 모아놓은 겔러리라니. 왕실이 존재했고 귀족의 영향력 컸던 영국의 특성이 반영된 겔러리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이런 컨셉의 겔러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재미있었다. 총 3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영국의 역사나 가문에 대해서 알고 본다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나는 얼마 전에 런던 방에 있던 먼 나라 이웃나라 영국 편을 본 게 전부여서, 영어로 제공되는 설명에 의존해야 했다. 대부분 귀찮아 점프해 버렸지만.
 17세기 관에 먼저 들어갔는데, 작품을 설명하는 방식이 재미있었다. 예를 들어 "Sir Henry Unton"라는 작품의 하단에는 “찾았니?” 라는 질문과 함께 주인공이 아기였을 때, 말을 탄 모습, 친구들과 식사하는 모습 등이 그려져 있으니 찾아보라고 재미를 부여했다. "Thomas Howard, 4th Duke of Norfolk"의 경우에는 ‘입술 사이로 보이는 두 개의 앞니가 인물의 캐릭터를 드러낸다’라는 설명을 통해 사람들이 지나쳐 갈 수 있는 그림에 좀 더 집중하게 유도하는 식이었다. 18세기 관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묘사한 압박적인 사이즈의 작품들이 몇 있었는데 (이런 작품들이 유럽의 겔러리에 꽤 많이 있었다.) "The Trial of Queen Caroline"의 경우에는 작품 옆의 멀티미디어 기계를 통해 작품에 등장한 모든 사람들을 검색해서 찾아볼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놓기도 했다. 

"Sir Henry Unton (circa 1596)"
©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Thomas Howard, 4th Duke of Norfolk (1565)"
©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포트레이트 겔러리에서는 작품을 볼 때 인물의 얼굴이나 소품, 의상을 통해 이 사람이 어떤 캐릭터를 가졌을까, 목소리는 어땠을까 짐작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Sarah Siddons"라는 actress의 초상화는 가면과 칼을 든 여자라는 소재가 인물의 미스테리한 느낌을 자아내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초상화들은 금방 보고 지나쳤다. 하나하나가 시대의 기록이기는 한데, 그 역사를 모르는 나에게 어떤 의미나 감흥을 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초상화중에는 "Sir (James) Paul McCartney ('Mike's Brother')" (Sam walsh, 1964)이 인상적이었다. 

Gilbert Stuart, "Sarah Siddons (née Kemble) ('Mrs Siddons with the Emblems of Tragedy') (1793)"
©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Sam walsh, "Sir (James) Paul McCartney ('Mike's Brother') (1964)"
© estate of Sam Walsh

 오히려 재미있던 건 (그리고 포트레이트 겔러리라는 이름에서 가진 기대에 부흥했던 건) 그라운드 층의 현대 초상화 전이었다. Maggi Hambling의 에너지와 색으로 가득했던 페인팅에 말 그대로 감탄을 자아냈지만 진정 압권인 작품은 컨템포러리관의 Fabiola 컬렉션(Francis Alÿs)이었다. 이 전시는 지금은 분실되어 없다는 19세기의 Faboila 그림의 모작들을 전 세계 마켓과 앤티크숍에서 수집한 것들을 모은 콜렉션들인데, 몇 개의 방을 가득 채운 모사화들은 감탄 감탄 감탄. 놀랍도록 높은 수준의 작품부터, 미술의 기초도 배우지 않은 사람이 그린 듯한 엉뚱한 비율의 그림, 재치 있게 상품으로 승화시킨 팝아트까지 개개인의 작품이 주는 변주가 즐거웠다.  그 작품들은 저마다 다른 사연과 색감, 이야기와 느낌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그런 작품들을 한 방에 모아놓고 보는 데서 또 다른 감흥이 있었다. 통제되지 않는 B급 에너지들, 마켓의 너절한 삶으로 녹아든 예술의 변주. 

Maggi Hambling, "(Alan) George Heywood Melly (1998)"
©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Francis Alÿs: Fabiola
©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1층의 특별전, 게이아이콘은 보지 않고(유료였다!) 뒤쪽에 마련된 portrait competition의 전시를 봤다. 관련협회와 겔러리가 함께 진행하는 초상화 작품을 다루는 대화의 입선작 전시였다. 인상적이었던 몇몇 작품이 있었지만 개개의 작품들이 주는 감동보다도, 이런 대회를 계속 열어 그 분야를 키워나가는 이들의 튼튼한 구조와 뒷받침이 부러웠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할애해서 뒤늦게 네셔널 겔러리로 향했다. 16세기 그림들을 마저 봤는데, 성스러운 가족의 초상이나, 성모와 아기처럼 수없이 반복되는 주제들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나중엔 다 같은 주제라 지겨워졌지만.) Central Hall에는 큰 그림들이 많았는데, 특히 "Portrait of a lady(La Dama in Rosso)" (Giovanni Battista Moroni, 1556-60)의 경우 옷의 질감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어서, (이런 질감이 회화로 정말 표현이 가능하다니!)감탄에 감탄을 자아냈다. 정말 깜짝 놀랐다. 이 시기에 많이 쓰였던 템페라화나 유화가 얼마나 섬세한 재료인지 모른다.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이어서 17th century painting으로 넘어갔는데 Nicolas Poussin과 Claude관의 하늘, 그리고 천장의 공기를 담아내는 그림들이 좋았다. "The Avenue at Middelharnis" (Meindert Hobbema, 1689) 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램브란트 그림의 어두움이 좋았다. 캔버스의 거의 대부분이 어둠에 가려져 있고, 작은 촛불에 의지해 사람이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은 인상. 젊었을 때의 화려한 옷을 입고 그린 자화상 보다는 나이 들었을 때의 깨끗한 그림이 더 좋았다.

Giovanni Battista Moroni, "Portrait of a lady(La Dama in Rosso) (1556-60)"
( "Photo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여기를 클릭하면" 고해상도로 확대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Meindert Hobbema, "The Avenue at Middelharnis" (1689)
( "Photo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여기를 클릭하면" 고해상도로 확대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18th-19th century painting 섹션에서는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의 "Rain Steam and Speed - The Great Western Railway (1840)"이나 "Margate from the sea (1835-40)"는 그 질감이 독특했다. 그의 초기 그림들은 아주 세밀한데 그보다는 후반(1835~)의 그림들에서 보여준 모호함이 너무 좋았다. 생각을 불러일으킨다고 해야 할까.
William Hogarth의 "the marriage a la mode serie"는 전체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당시에 영어 설명을 100퍼센트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풍자화 같은 사람들의 모습과 섬세한 묘사들이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었다. 모네의 그림들은 초등학교 때 미술 그림책에서 봤던 그의 말년작품에 대한 인상에 워낙 강렬해서인지 그 이전의, 다소 강렬한 붓터치들을 보면 당황스럽기도 했다.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Rain Steam and Speed - The Great Western Railway (1840)"
( "Photo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여기를 클릭하면" 고해상도로 확대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Margate from the sea (1835-40)"
( "Photo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여기를 클릭하면" 고해상도로 확대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Portrait of the Bookseller E.J. Fontaine(1885)"는 작가 Gustave Gaillebotte가 이웃의 모습을 그려 나중에 선물했다고 한다. 대머리가 다 보이도록 작업에 열중한 모델과, 그런 그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을 작가의 모습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Pierre-Auguste Renoir의 작품들은 네셔널 겔러리를 시작으로 유럽여행을 하는 내내 많이 볼 수 있었고 또 어디서나 인기가 있었다. "At the Theater(La premiere sortie) (1876-7)"는 꽃을 든 여인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작품이 1900년대로 다가갈수록 유명한 그림들이 많이 등장했고, 사람들은 더 많아졌다. 유명한 그림을 오래 보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느려진다. Georges Seurat의 "Bathers at Asnières (1883-4)"의 경우, 여기저기 화집에서 많이 보던 그림이었는데, 생각보다 큰 사이즈의 그림이었고 무엇보다 아주 가볍고 깨끗한 느낌에 비해 상상 이상으로 두텁고 물감이 많이 들어간 그림이었다. 수채화에 가까운 느낌의 그림이라고 생각했는데 두터운 유화였고, 그럼에도 가벼움이 느껴져 신기했다.

Gustave Caillebotte, "Portrait of the Bookseller E.J. Fontaine (1885)"
(© terminartors.com)

Pierre-Auguste Renoir, "At the Theater(La premiere sortie) (1876-7)"
( "Photo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여기를 클릭하면" 고해상도로 확대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Georges Seurat, "Bathers at Asnières (1883-4)"
( "Photo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여기를 클릭하면" 고해상도로 확대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Norbert Goeneutte의 "The Boulevard de Clichy under Snow (1875-6)"은 사진으로는 전혀 표현할 수 없을 눈 내린 길의 마차가 그려내는 궤적의 질감을 완벽하게 그려내서 감탄했다. Pierre-Auguste Renoir의 "The Umbrellas (1881-6)"처럼, 누구나 좋아할 만한 아름다운 그림이고 나도 특별한 이유를 찾기 어렵지만 그저 좋았던 그림도 있었다.
 Vincent van Gogh와 Cézanne의 방에 들어서면서부터 ‘핫’하고 큰 숨을 들이마셨다. 개인적으로 고흐의 "Starry Night" 은 어렸을 때 서른 살 생일에 보겠다고 다짐한 그림이었다. 사실 언제고 MoMA에 가면 볼 수 있겠지만 삶을 어느 정도 알게 되고, 그 그림에 담긴 삶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때쯤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었다. "Starry Night"이 여기 있지는 않지만 그의 유명한 작품들이 방 곳곳에 걸려있었다. "Van Gogh's chair (1888)"는 질감뿐만 아니라 색감에 매료되었고, "Sunflowers (1888)"는 마치 캔버스를 짓이겨 만든 그림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A Wheatfield, with Cypresses (1889)"의 하늘은 그저 좋아서, 돌아와서 감상을 틈틈히 적어 놓은 리플렛을 보니 “하늘...!!”이라고만 적어있었다. (나중에 이걸 컴퓨터에 옮기면서 보니, 이 때 세잔에 대해서는 별 감흥이 없었나 보다.)

Norbert Goeneutte, "The Boulevard de Clichy under Snow (1875-6)"
( "Photo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

Pierre-Auguste Renoir, "The Umbrellas (1881-6)"
( "Photo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여기를 클릭하면" 고해상도로 확대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Vincent van Gogh, "Van Gogh's chair (1888)"
( "Photo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여기를 클릭하면" 고해상도로 확대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Vincent van Gogh, "Sunflowers (1888)"
( "Photo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여기를 클릭하면" 고해상도로 확대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Vincent van Gogh, "A Wheatfield, with Cypresses (1889)"
( "Photo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여기를 클릭하면" 고해상도로 확대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National Portrait Gallery나 National Gallery는 전시공간에 대한 특별한 인상은 없지만, 소장한 작품들이 좋았다. 특히 포트레이트 겔러리의 컨셉이나,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를 유도하는 설명들이 좋았고, National Gallery의 방대한 디지털 데이터베이스는 부러웠다. 겔러리 뒤쪽으로 펼쳐진 거리에는 Let's fill this town with artists라는 화방도 좋고, Trafalgar 광장의 사자에 올라탄 아이들, 디자인페스티벌 기간 내내 펼쳐졌던 대형 체스판 아트워크도 멋졌다. 무엇보다 이런 고전 작품들을 무료로 언제나 볼 수 있다니. 회사가 끝나고 저녁까지 겔러리가 개방되는 날 좋아하는 고흐 작품 하나를 보고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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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rldofddanj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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