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

265,000 2012. 2. 24. 02:45 |
이번학기에 처음으로 인문사회과학부 수업의 조교를 하고 있다. 이 수업에서는 매 시간 강의내용을 요약한 요약지를 수업중에 작성해 제출하게 하는데 종이에는 '이름', '학과', '학번' 순으로 적으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매 수업때마다, 벌써 여섯번의 수업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꼭 '학과', '학번', '이름' 순으로 써 내는 학생이 있다. 그냥 그 흐름이 머리와 손에 익어서, 글자를 보면서도 읽지 않고 적어 내려가는 것이다.

아, 이름 쓰는 곳이구나. 무슨학과 몇몇학번 아무개.
한번도 자신을 어느학교 무슨 학과보다 앞에 둔 적이 없었던 것 처럼.

예전에 아이들이 나와 퀴즈를 푸는... 그런 방송을 본 적이 있는데 사회자가 "이름이 뭐에요?" 라고 물어보면 '저는 무슨 초등학교 몇학년 몇 반 누구 입니다' 가 그냥 자동으로 나왔던 것이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의 정체성이 무슨 초등학교에 있고, 몇학년에, 몇 반에 있다는 것. 그것들을 전제하지 않고는 자신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조금... 그랬다.



지난 여름, 기숙사 샤워실을 나오면서 뜬금없이 떠올랐던 서늘한 생각이 있다.  

"나는 이 생활에 너무 익숙하다."


기숙사에 사는 것, 딱딱한 매트리스와 기본적인 가구가 제공되는 곳에서 박스 여섯개로 채워질 짐들과 월 오십만원의 용돈으로 살아가는 것, 십분 이내의 통학으로 수업에 나가는 것. 학교가 곧 삶인 것. 이 학교와 나의 관계가, 지리적인 공간이나 배움의 시간에 한정지어지지 않고, 삶의 방식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이르자 조금 무서워졌다. 나는 학교와 삶을 잘 분리하며 살지를 못한 것이다.

나를 누구라고 소개할 것인가. 얼마전에 어떤 만남에서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라는 이야기를 듣자 숨이 턱 막혔다. 나도 내가 XX학교 XX대학원에 재학중인 아무개라는 것을 알고있다. 하지만 그런식으로 말 해버리고 나면 나는 정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정말 무서운 것은, 다른 방식으로 나를 소개하고 싶지만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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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rldofddanj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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