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만드는 작업을 위해 돈을 모으고 있어서, 여기저기에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다. 동기에게서 고등학생 애가 영상편집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데 해볼래? 라고 문자가 와서 네! 저 할래요! 덥썩, 물었다. 부산영화제 이후로 생활비가 많이 부족했고, 그래서 책 만들겠다고 아르바이트해서 벌었던 십만원을 생활비로 깨야했다. 이렇게 하기 시작하면 절대로 작업을 위한 돈 못 모을텐데... 싶어도 당장 쓸 돈이 없으니까, 그렇게 되었다. 지난번 책 만든 것도 부모님 돈 빌렸고, 영화제 예매하면서 부모님 카드도 썼으니까.. 늘 염치없이 돈을 타 썼지만, 이제는 그럴 염치도 남아있지 않아서, 작업을 위한 계좌에서 오만원씩 두번, 십만원을 뽑아써야 했다. 일단 아르바이트는 해야 한다.

그렇게 소개받은 아르바이트가 고등학생이 UCC대회에 출품할 영상이라는 사실은 아이의 아주머니와 통화하면서 알게 되었다. 아이는 아나운서가 꿈이라고 했다. 이 UCC가 상을 받던 받지 못하던 그 아이의 포트폴리오가 될 것은 뻔한 이야기였다. 변명 같지만 첫 통화당시 나는 그 아르바이트가 어떤 영상인지 몰랐고, 돈이 필요했다. 어영부영 약속을 잡았다. 밤 열한시에, 바쁜 아이를 대신해, 아주머니가 학교로 직접 온다고 했다. 마음이 점점 불편해졌다. 친구들에게 물었다. 너라면 어떻게 하겠니? K는 너 알바비에 영혼을 팔면 안되지 라고 했고, S는 정말로 돈이 궁하면 그냥 하라고 했다. 모두 농담처럼 이야기한 거였지만 다 요지가 있는 이야기였고 양심의 한 구석을 찌르는 이야기였다. 이 아르바이트는 결과적으로 내가 거의 다 작업하는 거고, 그 아이의 교외활동을 해 주는 거였다. 그렇게 돈을 손에 넣어야 할 정도로 궁한가, 내 작업이 그렇게 가치있고 필요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아주머니께 정말 죄송하다고, 그런데 그 아이의 힘으로 해야 하는 일을 제가 하는 건 옳지 않은 거 같다고,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못 하겠다고 했다. 밤 열한시에 차를 끌고 온 엄마라면 짜증도 나고 설득도 할 법 했지만, 아주머니는 그런 나에게 말 해주어서 고맙다고, 자기도 다 이해한다고 했다. 나도 한 사람이라 그러지 않아야 한다는 거 안다고, 그게 옳은 세상이라고, 하지만 돌아보면 주변 아이들은 다 그렇게 하는데 나 혼자 내 아이를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하셨다. 잘못된 거 아니라 옳은 거니까 학생이 불편하면 안 해도 된다고, 그렇게 중요한 공모전도 아니라며 오히려 나를 안심시켜주셨다. 그분의 말에 위로를 받으면서도 씁쓸했다. 우리는 옳은 것과, 하지만 한 개인이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없는 것, 세상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손 쓸 수 없는 것에 대한 무력함을 나누고 헤어졌다. 아주머니는 헤어질 때 내 이름을 물어보셨다.

라오스 여행에서 만났던 K누나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는 초등학교 선생님인데 언젠가 상담을 마치고 한 학부모에게 촌지를 받았다고 한다. 이런 건 받을 수 없어 죄송하다고 정중하게 거절하자 그 어머니는, 울음을 터트렸다. 자신도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세상의 방향 때문에, 혹은 사랑하는 누군가 때문에, 촌지를 내밀어야 했던 그 어머니의 부끄러운 울음에 누가 비난을 할 수 있을까. K누나의 사수는 촌지를 내미는 사람의 마음, 그걸 거절했을 때 그 사람이 받을 마음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의 진폭이 크게 남아있다.

아주머니를 보내고 기숙사로 가는 긴 길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 시원하다, 속 시원해! 그만둔 거 잘 했어! 이게 맞는 거야!"라던 <옥희의 영화> 속 대사가 떠올랐다.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곧, 그 마음이 텅 비어 허해졌다. 이제 수중에는 만 이천원 뿐이었고,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그 어머니의 마음과, 우리의 상황들이 자꾸 떠올랐다. 기숙사로 가던 중 친구들을 만나 왁자지껄한 술자리에 합류했지만, 그 마음은 오래 남아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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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rldofddanj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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