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돌아왔다. 아무래도 첫 문장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학교에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교에 돌아온 건 내가 아니라 '돌아와야 하는 시기' 혼자였나보다. 컴퓨터와, 옷가지들과, 학기 내내 별로 참고하지 않을 디자인 잡지들, 사소한 취향의 잡동사니들을 풀어놓고 난 뒤에야 슬리퍼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 안에서 양말을 벗고 신을 따뜻한 실내화도 가져왔는데, 정작 기숙사에서 돌아다닐 때 제일 많이 이용할 슬리퍼를 가져오지 않았다. 이건 단순히 슬리퍼가 없다는데서 그칠 문제가 아니다. 학교에서 살아가는 현실적인 삶에 대해 전혀 생각 하지 않고 짐을 챙겼다는 뜻이다. 박스에 대충 채워넣은 물건들은 KAIST 산디과 냄새가 물씬 났지만 그것들은 학교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적인 맛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아직 학교에 돌아오지 않았다.

 일 년 사이에 학교는 정말 많이 달라져 있었다. 유리로 뒤덮힌 미래지향적인 건물은 부실공사를 의심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완공되어가고 있었고, 학부식당 앞과 산디과 건물 등은 부분부분 얼굴을 새로 하고 있었다. 점심에 혼자 찾은 동측식당에서는 세트메뉴가 뭔지 몰라 얼굴이 빨개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혼란 속에서도 익숙한 것들이 점차 눈에 들어온다. 학기초 학부식당의 북적이는 풍경이나 월요일이면 태울관 지하 우리은행 ATM기기 앞에 늘어선 줄, 너희들의 이번 학기는 이전과 달리 특별히 괴롭고 터프하겠지만 또한 유익하고 재미있을 거라며 겁주다가 어르는 교수님의 오리엔테이션도 여전했다. 나는 정말 복학했나보다. 마음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학교는 제 속도를 내며 굴러가기 시작했다. 꽤나 빠른 속도다.

 3년 동안 몰랐던 사실 하나. KAIST는 복학생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나는 이걸 왜 이제야 알게 되었는지 의문스럽다. 정말로 매 해 휴학생과 복학생, 연차초과자들이 늘어만 가는걸까? 정말 많다. 교양시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추가등록을 위한 사인을 받기 위해 서 있고, 우리는 승리의 눈빛 - 동시에 이제 고학번이구나 하는 탄식의 눈빛 - 을 교환하며 매번 사인받기에 성공했다. 많은 1, 2학년들이 빈손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분명 내가 일 학년때 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그래! 이제 고학번의 시대야! 하지만 우리는 왠지 모르게 눈치를 보고 있었다. 서로 의지하며 학년을 농담의 소재에 올리기도 한다.

 여기에서 우리라고 부른 친구들은, 전적으로 산디과 '복학생'들 이다. 이제는 너무 많아 대세가 되어버린 이들. 우리의 이슈는 이번학기 어떤 과목을 들을 것인가, 졸업연구, 교수님, 복학생은 서럽다 정도로 그다지 사회적이거나 생산적인 것들은 아니지만 마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하는 것처럼 불안하고 들떠있고 자주 걱정에 휩싸이곤 한다. 감자탕을 먹으며 지난 수업들을 돌아보기도 하고, 사천칠백오십cc 맥주를 나눠 마시며 뒤늦게 자기소개도 했다. 다시 고삼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마 느낌만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나는 그렇게 불안하거나 걱정되지 않는다. 다만 분위기에 휩쓸려 99분의 마지막 1분까지 걱정과 근심으로 보내지는 말아야지 했던 다짐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조금 걱정될 따름이다. 일 년을 쉬면서 다른 사람보다 조금 늦어지는 것, 시간을 가지는 것, 조금 천천히 하는 것 등에 조바심 내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내가 공부를, 졸전을, 디자인을 할 때 조금 더 즐겁고 능동적으로 나의 길을 탐색하듯 하고 싶다고, 할 수 있겠다고,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학교는 외형적인 약간의 성형을 제외하고는 여전한 속도와 터프함으로 나의 다짐들을 흐트려 놓았는지도 모른다. 사실 학교 핑계를 댈 것이 아니라 나의 심지가 굳지 않았다. 걱정이 찾아오기도 전에 습관적으로 입에 올리는 걱정. 그것은 올 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도교수 발표가 났다. 놀랍게도, 운이라는 건 별로 없는 내가 1순위로 적어 낸 L교수님이 지도교수가 되셨다. 이제 시작인가보다. 나는 졸전을 하면서 겪는 일과 감정들, 내가 만들어 낼 디자인의 탄생 과정들을 잘 정리해두고 싶어졌다. 개인 프라이버시의 문제도 있고, 바쁜 학과 일정중에 이런 기록이 얼마나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왜 이래 나 복학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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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rldofddanj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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