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이후로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정신 없었던 것도 아니고 과제가 많았던 것도 아닌데, 여유가 없어 졸업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사실 약간의 시간들을 ‘딴짓’으로 보내버리는 게으름도 한 몫을 하고 있어 할 말은 없지만.
 이번 주 대부분의 시간을 바친 제품디자인시스템의 2주차 과제는 트렌드 리서치와 타겟 설정, 그리고 차세대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디바이스에 대한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풀어오는 것이었다. 복학생 4명으로 이루어진(아 C형은 한 학기 먼저 복학했구나-) 우리 팀은 복학생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비 효율적인 (즉 창조적인) 조모임을 하다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우리 학교의 산업디자인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디자인’이 아니라서 리서치를 바탕으로 문서화 되는 PPT작업에 가깝다. 때로는 피티질을 하려고 여기에 왔나 싶어서 허무해지기도 하고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무엇이 아닌 이것을 배우고 어디 가서 ‘디자이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불안해 지기도 한다. 작업의 효율을 위해서는 PT를 위한 피티질로서의 요령이 필요한데, 한동안 쉬느라 감을 잃은 우리는 자유롭게 리서치를 하느라 그것들을 다시 정리하고 가공하는데 쓸데없이 시간을 많이 소비해 버렸다. 처음에 포맷 하나만 만들어 공유했으면 깔끔했을 일인데…

 C형과 나, 그리고 B양과 K양 이렇게 넷은 제디프 같은 조를 시작으로 통합디자인, 교양 한 과목과 영어수업까지 4개 과목을 같이 들어서 일주일에 5일 이상은 보는 것 같다. 어제 뒷풀이 자리에서는 농담으로 앞으로 한 학기 중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만나는지 매일매일 시간을 체크해보자는 말도 나왔다. 한 주 내내 붙어있다 보니, 가족도 아닌 것이 동료 이상의 어떤 느낌이 있다. 이를 테면, 연년생 사촌형제들 같은 관계? 나만 그런 느낌을 받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C형은 일본 문화와 컴퓨터에 대해 매니아(를 넘어서 때로는 오타쿠)적인 사람인가 싶다가도 사실은 그것들에 대해서 거의 모른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고 각종 탈 것, 인터넷 세대의 유머와 감정적인 기복 사이에서 매번 다른 느낌을 준다. 2년 동안 지내면서 머리 속에 있었던 어떤 전형의 이미지를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자꾸 보여주어 우리의 놀라움을 사고 있다.
 B는 특히 재작년에 여러 수업에서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가까워졌다. 한 살 어리고 쿨 하지만 대화 속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어른스러운 생각이나 삶에 대한 태도들이 옆에 선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면이 있는 친구다. 아닌 척 하면서 항상 애쓰고 여러 의견을 듣고 한데 모으는 능력은 과제에서보다 관계에서 발휘될 때 더 멋진데, 이런 칭찬을 허무하게 만드는 허술함과 개그센스가 더 매력 있는지도 모른다.
 K는 친한 친구인데도, 생각해보면 같이 작업을 해 본적이 한 번도 없었다. 본인은 대기업이 답이라고 하지만 소규모 디자인 그룹에서 재미있는 그래픽적 작업을 하는 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우리 학교 산업디자인과에서는 드문 이미지의 친구다. 설명하기 어려운데 묘하게 남/여 구도의 긴장감을 자아내는 캐릭터인 것 같다. K와 B, 혹은 K와 C형의 대화를 듣고 있자면 그런 재미가 있다.

 이렇게 한 사람씩 써 내려가 보니 참으로 매력적이고 멋진 사람들인 것 같지만 (그리고 실제로 그렇지만) 우리가 모여 과제를 할 때 허술하게 치고 받는 개그나, 과제를 할 때 아픈 듯 배려하면서 이루어지는 약간의 논쟁들이 더 재미있다. 그런 충돌이 재미있어 과제 진행이 더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다.

 어느새 3주를 지나 4주차가 되어가고 KAIST가, 산업디자인학과가 생활이 되면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C형, B와 K는 사촌형제 같고, 의외로 만날 길 없는 C-K-N 트리오의 격정적인 수다도 듣고 싶어지고, 좀처럼 기회는 없지만 친해지고 싶은 매력이 있는 P양과 Y형도 흠모하고 있다. 과제가 생활이 되고 사람들과 마주치면서, 남는 것은 이런 감정들인 것 같다.
 이런 사람들 속에서 이런 것들을 느끼는 사이, 벌써 2월도 훌쩍 지나가고 있다. 화요일에는 교수님과 첫 미팅이 있고 그래서 어떤 방향성과 러프한 아이디어들을 가져가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컨셉과 키워드는 몇 가지 방향성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는데, 제품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

'세 개의 학번' 카테고리의 다른 글

One Namecard for Two Persons  (12) 2010.02.26
딴짓 DDanjit  (12) 2010.02.12
컨셉과 키워드  (2) 2010.02.11
Posted by worldofddanji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