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구하기

 4달이 조금 넘는 여행 중에, 런던과 파리에서는 각각 한 달 동안 집을 구해서 살기로 했다. 바쁘게 이동하는 여행은 어쩐지 하기 싫었고 게으른 나에게 맞는 형태의 여행도 아니었다. 한 곳에서 오래 지내면서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루키의 <먼 북소리>를 읽으며 확고해졌다. 여행에서조차 한국인의 커뮤니티에 속해 있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민박을 1순위로 제했고, 온전한 내 공간을 보장받기에 유스호스텔은 너무 번잡하다는 이유로 제외했다. 기숙사 생활을 계속 했지만 내 공간을 내가 마련해 살아보고 싶기도 했다. 이것은 사실 ‘여행하기’가 아니라 ‘경험하기’에 가까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여행객이 딱 한 달만 집을 구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신용의 문제가 제일 컸고, 한 달이라는 기간은 현지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렌트하기에는 애매한 기간이었다. 런던과 파리는 많은 볼거리를 가지고 있는 도시이고, 특히 미술이나 디자인의 측면에서 얻을 것들 것 많을 거라고 기대했다. 무엇보다 두 도시는 한인사이트(런던 http://04uk.com , 파리 http://www.francezone.com )가 굉장히 크고 활성화 되어있어 방을 쉽게 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도시는 비싼 물가와 고유의 집 문화 때문에, 공동의 공간(주방, 화장실, 거실 등..)은 공유하면서 방을 세 놓는(영국에서는 플랏 쉐어 flat share 라고 부른다) 시스템이 활성화 되어 있었다. 파리 역시 비싼 물가와 유학생들이 많아 방 임대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걱정했던 부분은 미리 정해놓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런던은 9월, 파리는 10월 중순 즈음이라고 막연하게 생각만 했고, 방을 직접 볼 수도 없어 미리 계약해 놓기도 애매했다. 유학생들을 보통 3개월 이상 혹은 6개월 이상 방을 빌리고, 여행자들에게 렌트하는 방은 1주일 미만인 편이라 한 달 동안 지낼 수 있는 방이 많지 않았던 것도 문제였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걱정한다고 개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우선 아이슬란드에서 런던으로 도착해, 빅토리아 역 근처의 민박집으로 갔다. 민박집은 너무 편안했고, 아침저녁으로 나오는 한식을 고려하면 집을 얻는 것보다 오히려 싼 결정일지도 모른다. (아주머니도 비수기라 조용하다며 장기할인을 해주겠다고 계속 제안하셨다.) 하지만 집을 알아보는 3일 동안 민박집에서 지내면서, 이건 너무 편안하고 한국 같아서 그냥 '관광'을 온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고 여기에 한 달이라는 시간을 할애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역시 처음에 다짐했던 것처럼 방을 찾아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방을 알아보면서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요소로 1. 청결할 것 2. 넓을 필요는 전혀 없지만 독립된 방 을 꼽았다. 까다로운 조건 같지만 나를 위해 욕심부릴 최소한의 무엇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방은 휘 둘러보는 것 만으로도 내가 수용할 수 있는 환경의 집인지 혹은 아닌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나쁜 의미로.

한 달간, 내가 소화 가능한 가격대에서 후보에 오른 집은 다음과 같았다.

후보1. 주당 65파운드. 싱글. Willesden Green역 근처. 무선인터넷 가능. 근처 세인즈베리. 버스와 지하철로 시내중심 이동가능
후보2. 주당 60파운드 / 65파운드. 두 방 모두 룸메이트 있음. 2주 데포짓 / 3주 노티스. Queen’s park역 근처. 무선인터넷 가능. 역 앞에 로컬슈퍼와 도서관. 버스와 지하철로 시내중심 이동가능
후보3. 주당 130파운드(큰 방) / 65파운드(작은 방). 싱글. 1주 데포짓 / 2주 노티스. Victoria역 근처. 무선인터넷 가능. 근처 세인즈베리. 시내중심에 위치

(데포짓 : 계약금으로 –주치 금액을 미리 지불하는 것, 계약이 끝나고 돌려받는다
노티스 : –주전에 집에서 나가는 것을 미리 통보하는 것. 다음 임대를 위한 배려이다.)

 후보1은 약간 멀지만 내가 생각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었고, 2번은 집 근처에 도서관이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3번 집은 위치가 가장 이상적이었지만 비용이 130파운드로 너무 비쌌지만 교통비를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주인이 동생이 머무는 방도 곧 비워진다고 그 작은방을 65파운드에 빌려줄 수 있다고 하셔서 이 방을 염두에 두고 가 보기로 했다.

 너무 더럽지 않고 독립된 공간이기만 하면 되, 라던 생각은 첫 번째 집에서부터 박살 났다. 어딘가 어눌하고 말도 잘 통하지 않아 조선족이거나 장애가 있으신 분이 아닐까 싶은 분이 역으로부터 10분을 넘게 골목골목으로 끌고 들어갔다. 역 근처라고 했는데… <남매의 집>의 침입자 같은 느낌의 분이셨다. 사실 조금 무서웠다. 집 보러 혼자 다니는 건 역시 위험한 일일까, 라는 생각부터 별의 별 생각들이 다 들었다. 오래된 주택가에 도착해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야말로 난장이었다. 카펫은 없는 편이 나을 정도로 더러워 있었고 냄새와 쓰레기들이 방을 뒤덮고 있었다. 누가 버린 매트리스를 가져다가 천을 씌운 게 아닐까 싶은 오래된 침대와 작은 책상, 더러운 화장실을 보고 나니 그냥 돌아가고 싶어졌다. 내가 너무 많은 걸 기대한 걸까? 이 가격으로는 이런 집 밖에 없는 걸까? 절망스러웠다. 이런 집이라면 차라리 불편해도 깨끗한 민박집에서 지내리라.

 두 번째 집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약속시간까지 역 근처의 공원에서 <상실의 시대>를 읽으면서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 것 까지는 좋았다. 유학생이신 주인 분은 친절하셨는데, 자신은 다른 집에서 살고 이 집은 온전히 렌트를 하기 위한 집이라고 했다. 즉, 이 집의 방을 세 놓고, 그 돈으로 이 집의 월세와 자신의 생활비를 충당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관리가 잘 되어있지 않았다. 첫 번째 집보다는 깨끗했지만 나는 나의 소박한(혹은 소박하다고 생각했던) 기준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닌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 봐야 했다.

 왕복 차비만 날린 것 같아 불편한 마음으로 세 번째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생각했다. 하나. 나의 기준을 낮춰야 한다. 최소한의 기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여기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둘. 혹은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생각을 해야 한다. 더 비싸고 더 청결한 집은 얼마든지 있다.
 다행히도 마지막 집은 나의 모든 기대를 뛰어넘는 너무 좋은 집이었다. 시내에 위치한 Victoria 역에서부터 거대한 세인즈베리, 음식점들을 거쳐 걸어 들어오면 가까이에 있는 아파트는, 조용하고 청결했다. 주방과 인터넷, 세탁기 사용에도 제약이 전혀 없었다. 큰 방은 서울의 내 방보다도 훨씬 크고 좋고 창도 넓었다. 비록 작은 방은 좁고, 무미건조한 편이었지만 침대와 책상, 장롱과 바람이 잘 통하는 창문이 있는 것 만으로 나에게는 충분해서 작은 방을 계약하기로 했다. 두 방은 누나와 동생분이 쓰고 있던 방인데 한달간 한국에 휴가를 다녀오시는 동안 세 놓는 것이 나의 여행기간과 묘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마음에 쏙 드는 방을 보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좋은 위치에 있는 방을 주당 65파운드에 계약할 수 있었던 건 행운에 가까웠다.


 이틀 뒤, 커다란 배낭 하나와 작은 배낭 하나를 메고 런던의 내 방에 입주했다. 약식이지만 계약서를 쓰고 키를 받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이 도시에서 나만의 공간을 얻었다는 것을 깨닫고 뭔가 이루어 냈구나 하는 묘한 뿌듯함과 흥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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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rldofddanj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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