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피트 닥터, 밥 피터슨 감독
크리스토퍼 플러머, 에드워드 애스너

 픽사의 10번째 장편 <업>을 봤다. 포스터에도 나와있듯 <업>은 3D로 만들어진 픽사의 첫 애니메이션이지만, 우리나라에서 3D는 더빙버젼으로밖에 상영하지 않기 때문에 우선 디지털2D로 보기로 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가장 우선시하는것은 영화의 제작포멧을 제대로 구현한 버젼으로 보는가에 있다. 비스타버젼인가 시네마스코프버젼인가, 극장의 스크린 비율은 어떤 버젼에 최적화 되어있나. (물론 대부분은 극장 스크린 비율에 대한 정보 없이 들어간다. 그러다 실망하기도 하고.) 디지털로 제작된 영화는 디지털로 보고 필름으로 제작된 영화는 필름으로 본다 등등... 필름이 영화 고유의 맛을 살린다고 하지만, 픽사의 영화는 누가 뭐라고 해도 디지털로 봐 주어야 한다. 픽사가 만든 디지털로 짜여진 섬세하고 선명한 화면을 놓치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픽사의 디지털 기술을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색색의 선명함에 감탄이 절로 나는 풍선의 투명한 색감이나, 실사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파라다이스 폭포의 절경, 몽타쥬로 보여주는 넥타이와 셔츠, 배지의 질감들은 직접 눈으로 봐야 한다. 물론 픽사의 위대함은 이런 렌더링의 기술을 잊게 만드는 이야기의 힘에 있지만 말이다.

(이하 스포일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픽사의 전작 <월E>는 (나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보내는 '엄청난' 찬사에 수긍할 정도는 아니었다. 화면은 너무 아름답고, 말 못하는 로봇들은 사랑스러웠지만 너무 많은 인간들이 나오는 후반부가 영화의 서정성을 망치는 것 같았고(나는 어쩌면 순수한 로봇들만의 이야기를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픽사 특유의 유머도 적게 느껴졌다. 영화가 별로였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영화에 기대했던 것들과 영화에서의 차이 때문에 아쉬웠다고 해야 정확할 것 같다. 그에반에 <업>은 픽사 특유의 유머와 센스가 여기저기에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월E>에서 느낄 수 있었던 압축된 서정성과 이미지로만 전달하는 감동이 잘 녹아있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월E>보다는 <업>이 더 풍성하게 느껴졌다.

 내가 픽사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매번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감탄할만한 설정을 이끌어내지만, 그 설정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와 주제라는 이야기의 가장 기본적인 것에 충실한 태도에 있다. <업>역시 집에 풍선을 매달아 남미로 여행을 간다, 라는 아주 환상적이고 (어떻게보면 말도 안되는) 만화적인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그 여행의 스팩터클함이 아니다. (여행은 생각보다 압축적으로 전개되어 금새 파라다이스 폭포 근처에 도착한다.)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왜 여행을 떠나는가, 를 둘러싼 캐릭터들의 이야기와 주제에 있다.
 칼과 엘리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해서, 결혼하고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대사없이 압축해 보여주는 프롤로그는 개봉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여러사람들에게 화자되고 있다. 차분하게 칼의 지난 배경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칼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몇가지 상징물들을 세심하게 훑어낸다. 동시에 나이듦, 일상의 순간들에게 꿈의 자리를 내어주어야만 하는 삶의 고단함이나 그럼에도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작은 개인의 사랑은 삶을 조용히 성찰하게 만드는 성숙함이 묻어난다.
 영화는 칼의 이야기를 동력으로 굴러가지만, 순간순간 조연급 인물들에게도 각자의 삶을 이야기할 시간을 준다. 러셀이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하다가 가족사와 작은 꿈을 고백할 때, 그 장면은 온전히 러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캠핑 한 번 해본 적 없는 철부지로만 여겨졌던 러셀은 그 뒤부터는 그 자신의 삶을 배경으로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이런식으로 영화속의 인물들은 자신의 지난 삶을 바탕으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그밖에 조연캐릭터들의 아기자기한 디테일과 귀여움들도, 역시 픽사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파라다이스 폭포 옆에 집을 짓고 모험을 하는 것을 꿈꾸던 엘리와 그 꿈을 실현시켜주고 싶다는 동기로 시작한 칼의 여행은, 여행의 진짜 목적을 깨달으면서 두번째 비행을 시작한다. 무거운 짐들은 던져버리되 소중한 추억은 곱게 내려놓고 떠나는 비행은 자유롭고, 그렇기에 급작스러운 이별에도 미소지으면서 작별인사를 건넬 수 있다. 무엇이 모험일까. 집에 풍선을 매달고 꿈을 실현시키는 방식의 모험도 있고, 배지를 모으면서 공상속의 꿈을 키워나가는 방식의 모험도 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삶의 여정이라는 모험도 있다. 그래서, 진짜 자신의 모험을 떠나는 칼의 뒷모습이 그렇게 후련해 보일 수가 없었다.

Posted by worldofddanj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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