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면

그날의 생각 2010. 4. 20. 05:33 |

 <무한도전> 복싱특집을 봤다. 고통스럽게 봤고 두 선수의 신념이 겨뤄지는 경기에선 눈물이 났다. 국적이나 승패와 상관없이 링 위에 오른 두 사람을 모두 응원하게 되는 이 기이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나는 김연아를 떠올렸다. 금메달을 따는 순간이 아니라 자신의 연기를 마친 뒤에 눈물을 흘렸고, 모든 압박감이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는 인터뷰를 보면서 그 동안은 그런 가보다 했던 정신력이라던가 부담감이라던가 하는 말들이 확 와 닿았다. 아마도 나는 수 많은 시간동안 치열하게 갈고 닦은 삶을 가지고 삼분 남짓한 승부에 오르는 순간에 매혹됐던 것 같다.

 이따금 울컥하고 치솟는 나에 대한 끝없는 소외는 대면의 순간을 피해가는 내 삶의 태도 때문이다. 수능을 피했고 고백을 피했고 군대를 피했다. 사실은 용기가 없으면서 진짜 나의 삶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핑계를 대고 계속 현실의 테두리에서 서성였다. 나는 나와 대면하기를 피하는 대가로 매 달 십삼만오천원을 받는다. 샤워를 하면서 나의 이십대는 대면의 순간을 피해 도망치던 시간이었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다. Y형은 “너는 네 취미가 너를 충분히 먹여 살려주기 전까지는 힘겨운 엑스트라 밥벌이를 병행해야 되고 그 프로포션을 맞춰나가는 과정이 네 태도에 달려있겠지.”라고 했다. 아마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적인 노력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대면의 순간을 나중으로 나중으로 유예하는 데서 오는 자책감을 떨치지 못할 것이다.

 나도 수 많은 시간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워 삶의 무대에서 내가 응당 견뎌내야 하는 것들과 대면하고 싶다. 이기든 지든 상관없는 그 순간을 겪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냥 살아간다. 삶은 몇 분의 순간과 그 뒤의 감흥으로 끝나는 스포츠가 아니라 길게 이어지는 잔혹한 뒷골목에 가깝다. 나는 이런 세속적인 핑계를 대면서 계속 대면의 순간을 피하고, 그런 나를 소외하고, 그러다가도 쌉쌀하게 살아간다. 사실 무엇과 대면해야 하는지 무엇을 치열하게 싸우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4.19 앞에서 부끄러워지고 김예슬씨의 선언에 고개를 숙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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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rldofddanj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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