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 코를 박고 C형과 교수님의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깨달았다. 지금대로라면 틀렸다.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작은 말과 행동과 움직임이 그걸 가르키고 있었다. 터덜거리며 나와 괜히 먼 길을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짙은 청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과 스쳐가는 자동차가 뿌리는 노랗고 붉은 라이트의 대비가 쓸쓸했다. 밥 먹을 기분도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구질구질해도 살아가는 사람이다. 패스트푸드를 먹어치우고, 냄새나는 빨래를 해치우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네시간을 잤다. 내가 시달렸던 것이 고작 네 시간이면 회복될 값 싼 피로감이었던가. 그것이 더 슬프게 만든다.

 최근에 조금씩 침잠하고 있었다. 아련한 것들도 생겨나고, 안타까운 것들도 늘어간다. 제디프 아이디어가 좋지 않았다거나 졸업전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아 우울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것들이 상징하는 작은 의미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라는 삶에 대한 반성과 자조가 나를 작게 만든다. 교수님 앞에서 되지도 않은 리서치와 생각의 꾸러미를 늘어놓는 것으로 이주짜리 미팅을 채워내는 내 모습이 아니라, 그래서 지난 이주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꾸 의문하게 되는 내가 작다.

"어차피 재능이 있다면 그걸 주체를 못해서 때려치우게 되어있어."

 Y형의 말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저는요, 나에게 어떤 재능도 없어서, 살아가는 것에도 별다른 재능이 없어서 그냥 이렇게 살아갈까봐 그게 무서운 거에요. 제디프와 제디시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 대기업 디자인팀 소장 자리에 앉고 싶다거나 그런게 아니고 내 것을 살아가고 싶은 것 뿐인데, 그럴 재능조차 없어 내가 나 아닌 무언가로 살까봐 그게 무서운 거에요. 때려치울 뭔가가 없을까봐 그게 무서운 거에요. 삶에도 별다른 재주가 없는 사람은 삶조차 때려치우지 못하고 계속 살아가야 겠지만, 그 사람의 마음은 어떻겠어요.


 학교에 돌아와 주어진 시간동안 치열하게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고 싶다는 내 생각이 어리석은지도 모른다. 이쪽은 참신한 아이디어와 한시 마감의 제출과제가 있고 잘 차려입고 높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해야 하는 세계이니까. 그러다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다, 그마저 나의 가난한 재능 때문이다.


이듬해 봄에 나는 김나지움을 떠나 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아직 어디서 무얼 해야 할지 몰랐다. 코 밑에는 작은 수염이 자랐다. 나는 성인이었다. 그렇지만 완벽하게 무력했고 목표가 없었다. 단 한 가지, 내 속의 목소리, 그 꿈의 영상만 확실했다. 그 영상의 인도에 맹목적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임무를 느꼈다. 그러나 어렵게 느껴졌다. 그리고 날마다 나는 반항했다. 내가 돌았나보다고 때때로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은 걸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해내는 것은 나도 모두 할 수 있었다. 약간 열심히 애쓰면 플라톤을 읽을 수 있었고, 삼각법 과제를 풀거나 화학 분석을 따라갈 수 있었다. 단 한 가지만 나는 할 수 없었다. 내 안에 어둡게 숨겨진 목표를 끌어내어 내 앞 어딘가에 그려내는 일, 교수나 판사, 의사나 예술가가 될 것이며, 그러자면 얼마나 걸리고, 그것이 어떤 장점들을 가질 것인지 정확하게 아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려내는 일, 그것은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나도 언젠가 그런 무엇이 될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내가 그걸 안단 말인가. 어쩌면 나도 찾고 또 계속 찾아야겠지. 여러 해를, 그러고는 아무것도 되지 않고, 어떤 목표에도 이르지 못하겠지. 어쩌면 나도 하나의 목표에 이르겠지만 그것은 악하고, 위험하고, 무서운 목표일지도 모른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데미안

싱클레어, 나는 내 속의 목소리, 꿈의 영상이 없어요. 안 보여요. 그러니까 나는 애초에 표식이 없는 사람인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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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rldofddanj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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