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의 산책

세 개의 학번 2010. 3. 15. 05:13 |

 너무 배가 고파서 아프다. 밥 먹고 올게 형. 천천히 작업해.

 컴퓨터를 끄고 밖으로 나왔다. 매점에 가거나 식당에 갈 수도 있지만 일부러 학교 쫑문까지 먼 길을 걸어 나간다. 자정의 시간에 홀로 십분을 걸어 학교를 나갔다 오는 일은 나에게 쉼표와 같다. 항상 무언가를 하거나, 누군가와 있거나, 무언가에 쫓긴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살고 있는 나로서는, 일상이 곧 학업인 이 기묘한 학교가 버겁다.
 환절기라서 낮에는 봄 옷과 겨울 옷 사이에서 곤란해 하지만, 밤에는 겨울 잠바를 입고 적당히 서늘한 길을 걷기에 더없이 좋다. 옷이 조금 무겁지만 오히려 그 무게를 느끼면서, 자크를 코 바로 아래까지 올리고 걷는다. 손은 주머니에 넣고 팔을 몸에 붙여 나를 얇은 판처럼 만든다. 음악에 따라 슬퍼지거나 냉소적이어지거나 멜랑꼴리해질 수도 있는 상태 - 그러니까 어떤 기분도 아닌 상태로 걷는다. 남녀 한 쌍과, 자전거를 타고 오는 외국인, 소란스러운 남학생 무리를 지나친다. 때로는 이 학교에서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게 고마울 때가 있다.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그 전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 휴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나는 내가 무얼 해야하는 존재인지 아직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무얼 하든 내 존재에 가까운 답을 내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작은 과제나 디자인에 너무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것들을 통해 생각하고 고민하는 긴장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가려던 떡볶이 집은 문을 닫아서 근처 음식점에서 라면을 먹고 돌아왔다.
신축 매점에서 산 꿈틀이 젤리를 질겅거리면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대전에 애정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나는 늘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온전히 혼자 보내는 서늘한 산책을 하고 돌아오면서 나중에는 이 길도 지독히 그리워하는 날이 오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다섯시 반이다. 얼른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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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rldofddanj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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