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시간기억

그날의 생각 2009. 7. 23. 03:10 |
우리는 이동한다. 그 공간들 사이로 시간을 보내면서 기억은 쌓여간다. 뭉클해지는 공간과 시간과 기억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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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rldofddanj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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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준비는 비행기표를 끊는 것으로 시작됐다. 헌데 시작부터 쉽진 않더라. 너무 많은 항공사와 항공권들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니가 가고싶은데로 골라서 검색해봐'라며 최대한의 자유 - 물론 각종 제한과 조건이 따라붙는 표 이지만 - 를 보장하는 것만 같았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해야겠다, 라는 여행의 방향이 분명하지 않다면 이거 다른 배낭여행자들과 똑같은 코스를 밟고 똑같은 것들을 보고 오겠다 싶었다. (나는 종종 남들이 다 읽는 베스트셀러라는 이유로 관심있던 책을 읽지 않거나 남들이 다 듣는 노래라는 이유로 일부러 듣지 않았다. 여행지를 결정하는데도 그런 심보가 들기도 했다.) 여행의 경우에도 항상 누군가가 제공하는 여행코스에 동승하기만 하면 끝이었는데,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1000자 내외로 서술할 수 있는 (각종 제한과 조건이 따라붙지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는) 서술형 답안지 같았다.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지를 고민하다가 문제를 다시 읽고 의도를 파악하기로 했다.

 "막연히 꿈 꾸던 것들을 실천한다"라는 게 떠나는 동기라고 했지만, 여행지에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혹은 좀더 근본적으로 어떤 여행을 할 것인가에 대한 설명은 되지 않았다. 앞에서 썼듯이 나는 '유명한 곳에서 디자인을 배우고 싶다. 자유롭게 세상을 보고싶다'라는 두 가지를 모두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기엔 미국의 뉴욕이나 일본의 도쿄보다는 유럽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러 교통수단으로 서로 닮은 듯 다른 문화를 접할 수 있고 아름다운 풍경도 볼 수 있겠다. (플러스, 내가 여행초보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유럽이 여행지가 되었다.

 디자인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우선 런던과 파리를 꼽았다. 누구나 가는 여행지라는 점과 비싼 물가는 마이너스였지만 한 곳에서 머물면서 디자인과 영화, 예술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이 좋았다. 플랏쉐어하는 학생이 많아 집을 구하기 쉽다는 것도 또 다른 이유였다. 이 두 곳에서는 한달정도 머물면서 천천히 도시를 보려고 한다.

 자유롭게 세상을 보고싶다, 라는 욕망은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시규어 로스의 음악다큐멘터리 '헤이마 - 시규어 로스'를 보면서 시작했다. 따라서 아이슬란드는 순수한 '여행'의 로망으로 가장 먼저 꼽았다. 9월이면 바로 겨울이 되면서 대부분의 버스가 운행을 중단한다고 해서 여행도 8월 중순으로 앞당겨졌다. 큰 나라의 주요도시만 보기보다는, 작은 나라를 구석까지 보고싶다는 이유에서 주변의 작은 나라 - 아이슬란드와 영국 사이에 있는 덴마크령의 페로제도 라던가 영국 옆에 있는 아일랜드 등등 - 들도 여행지로 선택되었다.

 고민했던 여행의 마지막은 스위스를 보고 독일로 갈까, 아니면 이탈리아로 갈까였다. 스위스의 기차여행이 매력적이었지만 4개월짜리 여행의 막바지에 돈이 부족할 것이 너무 확실해서 기차비용이 될지 애매한데다가 독일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이탈리아는 남들 다 하는건 싫어하는 심보가 발동해 괜히 가기 싫었는데 (가 본 적도 없는 주제에 여기저기서 많이 본 유적지를 보러가기가 싫은 이 심리는 뭘까.) 친퀘테레 도보여행과 내가 사랑하는 영화 "애프터 미드나잇"의 배경인 토리노에 가보고 싶다는 이유로, 결국 로마 표를 샀다. 하지만 여전히 저울질 중이다. 거의 5개월 뒤의 일이니, 누가 알겠는가.

 이렇게 두 가지 목적과 느낌으로 여행지를 골랐다. 한 곳에 머물다가 어떻게 그짐을 싸들고 걸으면서 돌아다니는 여행을 할 수 있을지 나도 잘 모르겠다. 다음 과제는 그 둘 사이에 균형과 현실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 될 것 같다.

 이런 생각 끝에, 런던 인 로마 아웃 비행기 표를 끊었다. 이제야, 여행 준비가 시작된 것이다.


* 나의 대략적인 일정은 대략 "아이슬란드 2주 - 페로제도 4일 - 런던 1달 - 영국 2주 - 아일랜드 2주 - 파리 1달 - 프랑스 2주 - 이탈리아 2주" 정도가 될 것 같다. 물론 초반 아이슬란드와 페로제도를 제외하고는 예약도 없이 가는 것이고, 어디를 갈지도 여행 하면서 결정할 것이라 여백이 훨씬 많다. 나중에 스페인으로 방향을 돌리거나 스위스에 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돈이 없어서 마지막 한 달은 근근히 한 곳에서 버티다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런던에 입국할 때 불확실한 여행일정을 증명하지 못해 입국이 거부되는 것이다. '여행을 실천한다'라는 것 하나만 달성하고 다음날 귀국하는 일이 벌어질까봐, 그게 지금 가장 큰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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