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형성

세 개의 학번 2010. 3. 10. 04:25 |

 전화 한 통에 불현듯이 일어났다. 잠에서 깨어나며 현실에 적응할 새 없이 벌떡 일어나게 되는 이런 순간은, 보통 좋은 징조가 아니다. 아침 버스로 서울에 가서 아빠 생신기념으로 가족이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로 되어있었는데, 누나의 전화를 받고 일어난 것이 열 한시 반이었다. 누나는 됐다고, 다시 약속 잡으면 된다고 일단 자라고 했지만 다시 누울 수가 없었다.
 이런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잠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적응과정 없이 깨어난 몸은 두 세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수업이나 조모임 혹은 누군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껄끄럽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없는 일은 없고, 진짜 일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몸이 일어나게 된다는, 의지의 가능성을 아주 높이 평가하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떠올라 불편하다.
 그야말로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기분이다. 제작년, 휴학하기 직전에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하려고 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주었다. 아니야 어쩌면 그들은 나에게 기대도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아침이건만 어둑한 기숙사에서 건조하게 얼굴을 비비고 내가 또 누군가를 실망시켰구나, 깨닫는 순간은 정말이지 외롭다.

 맥주와 계란말이를 앞에 두고, Y형과 앉았다. 가볍지만은 않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올 해 초에 K누나와 이야기 했던 것이 떠오른다. 세상은 매트릭스여서 무엇에 대해 고민하는 순간 그게 전혀 다른 곳에서 찾아오기도 한다고. 나 역시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나를 이끌어주는 여러 ‘데미안’을 만났다. 익숙함에 안주하는 나의 나태한 부분을 지속적으로 두드려주어 가슴 뛰게 만들어 주는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이 감사했다. K누나는 내가 너의 데미안 이야, 라고 했다. 나는 맞는 거 같아요, 라고 했지만 어쩌면 내가 누나의 데미안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Y형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마음 한 구석에 끈기를 가지고 두들기는 망치의 울림이 느껴진다. 나 혼자 그렇게 해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익숙하게 살아가면 안 되는 것 아닌가. 형은 때로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어휘를 사용하기도 했다. 나는 철학이나 비평, 본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테이블이나 천장처럼 멀리에 시선을 두고 상대방의 문장과 단어를 곱씹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잘 모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의 버릇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빛을 맞추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상대방이 겨우 꺼내 보여준 진심에 대해서도 비겁한 행동처럼 느껴진다. 한 시간 정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한 시간보다는 주점의 천장을 더 오래 바라봤던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을 통해 발견하는 나의 부족함은, 내가 더 어렸을 때부터 나를 흔들었던 주제였다. 살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않을 정도로 익숙하게 살아가다가 우연히 만나는 그런 특별한 사람들은, 나에게 새로운 관점이나 삶에 대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멋있고 부러워서 닮고 싶어 미칠 것 같지만 나는 한없이 가볍고 모자란 사람이라 샤워를 하다가 웅크려 앉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Y형이 나에게 철학과 상식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했다면,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아주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실상 굉장히 옅은 것들을 가지고 존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도서관에 갔다. 고백하건대 난생 처음으로 철학코너에 갔다.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방대한, 정제된 지식들을 앞에 두고 나는 내 무지함을 다시 확인하고 돌아왔다. 읽지도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럴싸해 보이는 철학 책 두 권을 빌렸다. 도서관 아르바이트를 하는 P가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녀도 나에겐 그런 존재였다. 부끄러워 도망치듯 도서관을 빠져 나왔다.


 미래 트렌드 리서치를 위해 책을 읽다가 다음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적어도 이제 낯선 사람에게 지도책을 들이밀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올 것이다."
핫트렌드 2010 : 지속과 실속 사이에서 길을 찾아라, 126p, 한국트렌드연구소/PFIN 지음

 GPS와 모바일 디바이스 무선인터넷의 결합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무시무시한 가능성을 안겨주고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이제는 여행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길을 물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것이 좋은 방향의 진화일까? 나는 중간중간 유실된, 최단/최적이 아닌 GPS를 떠올렸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 대화해야 하는 방식의 여행은 어떨까. 결국 마음에 남는 것은 사람들이 주는 감정이고, 나는 '사람들과의 아날로그적인 접촉'을 주제와 함께 가져가고 싶다. 우연한 만남이 주는 잠시의 인연, 나는 그것의 소중함을 풀어보고 싶었다.
 모니터 앞에 펼쳐놓은 노트에서 처음에 생각했던 세 가지 키워드들은 여러 갈래로 분해되거나 합쳐지고 있었다. 문제는 이런 만남, 이런 인연이 지속시킬만한 가치가 있느냐였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첫 미팅에서 교수님께서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셨다. 이런 명함을 통해 서로 주고받는 것이 사람들의 니즈(needs)인가, 여기에서 어떤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가치를 끌어낼 수 있는가? 주변의 친구들은 그들의 여행 중에 짧은 만남과 호의가 서로 연락처나 흔적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이어지지 않았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고도 했다. 놀랐지만, 생각해보면 산티아고 길을 제외한 다른 여행에서는 나 역시 그랬다. 산티아고에서의 경험이 너무 강렬해서 나는 보편적인 눈을 잃고 그 때의 감정만으로 디자인을 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를 빌렸다. 아무런 지식이나 사전에 읽은 책 없이 떠났던 까미노였기에, 돌아와서 산티아고 가는 길에 관한 책을 읽으면 그 기분이 묘하겠다고 생각했다. 예상과 달리 코엘료의 <순례자>는 그 길에 대한 글이라기보다는 이 길을 소재로 탄생한 전혀 다른 명상서에 가까웠다. 익숙한 지명이 나올 때마다 지난 몰스킨을 뒤져 그곳에서의 기억을 환기했고, 몇몇 구절에서는 내가 느꼈던 감흥들이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었다.
 화장실에 갈 때 혹은 자기 직전에, 하루에 한 챕터씩 <순례자>를 읽다가 문득 그 시간들이 그리워 눈물이 차 오르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나는 여행 중에 만났던 짧지만 고마웠던 인연들을 어떻게 이어갈 수 있을까, 에 대해서 디자인 해보겠다고 하면서 막상 그들에게 메일 한 통 보내는 걸 힘들어 하고 있다. 어떤 디자인 제품이 우리를 연결시켜주기를 기다리기 전에, 내가 메일을 직접 보내면 되는데.
 힘들게 어설픈 영어로 떠듬떠듬 그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길 위에서 1유로짜리 카메라로 찍었던 사진도 몇 장 첨부했다.

For 사토시, 아키코

때때로, 나는 까미노를 생각해.
나에게 그 길은 정말 특별했어. 하지만 그때는 길을 다 걸을 때까지도 그걸 알지 못했어.
나는 때때로 책상에 앉아 눈을 감고 길에서 만난 친구들과, 우리의 멋진 저녁식사와, 즐거웠던 오후 나절, 콜라를 먹겠다는 신념으로 힘들게 걸었던 발걸음을 떠올려.
내가 거기에 갔었던 것과 너를 만난 것에 대해 정말 감사하고 있어. 진심이야.



 그들과 함께 했던 추억들이 떠올라 나는 굉장히 그립고 외롭고 슬퍼졌다. 진짜 살아가는 것은 이쪽인데 어째서 그쪽이 더 생생하게 느껴질까? 나는 여기에서 또 누군가를 실망시키거나,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마음을 두드리는 소리를 외면하거나, 도서관에서 읽지 못할 책을 자꾸 빌려온다. 벌써 봄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 반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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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rldofddanj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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