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한참 방치된 곳이긴 하지만

혹시 종종 찾아주셨던 분들께는 알리고 싶어서...


이곳은 천천히 정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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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5be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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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라는 개인적인 공간이 그 사람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는가. 가구의 배치로부터 그 사람의 생활 방식을 짐작해 볼 수 있고 물건이 수납된 형태를 통해 습관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누군가의 방을 방문하게 될 때마다 탐정이 된다. 그렇다면 기숙사는 어떨까? 짧게는 4개월, 길게는 1년을 임대하는 이 공간에는 공개 입찰로 들어선 단조로운 가구들과 두세 박스에 담겨 빈번한 이사가 용이하도록 간소화된 물건들이 있다. 그것들을 통해서도 거주자를 짐작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면 슬픈 일이다.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대학원 3년, 총 10년간 나는 기숙사의 이 방 저 방을 '배정받아' 살았다. 10주년을 기념하여 - 그것이 기념할만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 내 방을 묘사해보기로 한다. 정적인 기록이나 타인의 공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지루할 수도 있겠다.


두 명에게 4.8평의 방이 주어진다. 한 방을 둘이 함께 써야 하므로 모든 가구는 2개씩 양 벽에 붙어 대칭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나에게 주어진 2.4평 - 지금은 방의 왼쪽 절반을 쓰고 있다 - 은 룸메이트가 쓰고 있는 나머지 절반과 완전히 같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장 왼쪽의 벽에 신발장이 있고, 그 옆으로 옷장과 침대, 그리고 책상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일괄 주문 제작된 가구들은 방의 너비에 딱 맞춰 들어가 있어서 그 효율성을 자랑한다. 게다가 모든 가구는 완전히 같은 소재로 제작되어 있어서 신발장-옷장-침대-책상이 붙어있는 하나의 가구가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입구의 반대쪽에는 큰 창이 나 있고, 창을 옆으로 두고 바로 책상이 붙어있다. 책상 위로는 4단의 책장이 있는데 해가 거듭될수록 책장의 책은 줄어들어 이제는 거의 2단이 비어있다. 기숙사에 책을 가져다 놓아도 잘 보지 않기도 하거니와 이사를 할 때 가장 무거운 짐이 되기 때문이다. 책상과 침대 사이에는 책상보다 조금 높은 단이 있어서, 핸드폰이나 지갑 같은 물건들을 올려놓고 자기 전에 볼 책들과 물건들을 수납할 수 있다. 침대는 아주 많은 학생을 견뎌낼 수 있기 위해 일부러 딱딱한 것으로 특별히 주문한 것이 아닌가 싶은 매트리스가 특징적이다. 침대 아래의 수납공간은 먼지가 굴러다니거나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거의 이용하지 않고 쇼핑백, 세제 같은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넣어두는 데 그친다.


침대 바로 옆에 붙어있는 옷장은 너비가 팔 길이 정도 되는 데 반해 깊이는 그보다 훨씬 깊다. 옷장의 가장 안쪽으로 3단의 수납 칸이 있고 그 앞쪽으로 옷을 걸 수 있는 봉이 있는데 여기에 옷을 걸고 나면 안의 수납 칸은 완전히 가려져 안 보이기 때문에 사실상 활용이 불가능하다. 새로운 계절이 되어 지금 입던 옷을 꺼내면 안쪽에서 한 계절 동안 조금씩 먼지를 먹은 옷들이 발견되는 식이다. 그리고 그 침대 바로 옆으로 7칸짜리 신발장이 있어 사계절의 신발과 구두, 발 냄새를 제거하는 스프레이 따위가 들어있다. 걸레도 널어놓았고, 신발장 위에는 세면도구를 담은 바구니를 보관한다.


이런 가구배치가 정확히 대칭으로 반대쪽 벽면에도 있다. 물론 그 활용은 사람마다 다르다. 책장과 옷장 사이에 끈을 매달아 침대 위를 가로지르는 빨래를 너는 공간을 만들거나 미니 냉장고를 한쪽에 비치하는 등의 개인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인 책상-침대-옷장의 단조로운 구성을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이 두 세트의 가구 사이에 있는 한 줌의 바닥에서 맨몸운동을 하기도 하고 이따금 야식을 사 와서 룸메이트와 먹기도 한다. 빨래 건조대라도 펼쳐놓으면 다른 사람은 침대를 밟고 넘어가야 한다.


좁은 공간에서 언제나 이사를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면 필수적이지 않은 삶의 많은 부분은 덜어내게 된다. 간결해지는 것이 아니라 생략된다. 생활은 책상에 앉아서 할 일을 하거나 쉰다, 옷을 갈아입고 씻는다, 침대에 누워 잠을 잔다 정도로 정리된다. 공간은 의미가 중첩된다. 과제를 하고 밥을 먹으며 컴퓨터를 하고 성욕을 처리하는 모든 활동을 책상에서 소화한다. 최근에 입은 옷은 침대 위에 쌓아두고 있다가 자야 할 때면 책상과 의자 위로 옮겨 쌓아둔다. 냉장고가 없으므로 과일이나 채소를 굳이 먹고 싶다면 그 날 먹을 분량만을 사와야 한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즐길 책과 음반은 기숙사에 두지 말고 가능하면 집으로 보낸다. 포스터나 사진을 붙이는 행동을 그만둔 지는 한참이다.


기숙사도 누군가에게 사치라는 것을 안다. 말도 안 되게 저렴한 값으로 주거의 고민을 덜어내고 있고 그마저 부모님이 부담해 주시고 있다. 이마저도 학생의 신분이 유지될 몇 년간의 혜택이다. 하지만 월수입이 고스란히 월 지출로 수렴하는 대학원의 생활이 끝나고 기숙사를 나가야 할 때, 나를 위한 2.4평의 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갑갑해진다. 그리고 그때 두 세 개의 박스에 담길 물건들 이상의 삶이 나에게 있기를 바란다.


한 장소를 지속해서 방문하다 보면 그곳에는 이야기가 생긴다. 하물며 살아가는 공간은 어떠하랴. 이전에 배정받았던 곳과 완전히 다르지만 소름 끼치게 유사한 새 방에 들어갈 때마다 여기에 과연 어떤 사람들이 살았고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가 싶다. 내가 10년간 옮겨가며 살았던 방에도 내 삶이 남아있을지, 그리고 지금 그 방에서는 누가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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